여름 밤비가 흠씬 내린 날 아침이다. 가만히 창 밖을 내다보니, 학교를 간다고 나서던 꼬마가 땅바닥에 엎드려 뭔가를 뚫어지게 내려다보다가는 갑자기 주저앉아 손으로 만지작거린다. 뭘 하나 궁금해 고개 숙여 본 어머니는 질겁한다. 꿈틀거리는 지렁이를 아들 녀석이 집어 올리고 있지 않는가. 반사적으로 앞집의 그 어머니는 아이의 등짝을 세차게 땅! 내려치곤, “이놈아, 더럽다”하고 냅다 고함을 내지르면서, 아이를 개 잡듯 목 줄기를 낚아채고는 끌고 간다. 그 녀석은 지렁이에 미련이 남아 버텨보지만 엄마의 힘에 못 이겨…, 아뿔싸, 저러면 안 되는데…. 어머니가 저럴 수가 있나? 일부러라도 지렁이를 잡아다가 같이 매만지고, 또 관찰을 시켜야할 어머니가 아닌가. 아무튼 그 아이는 과학(관찰)을 하고 있었고, 그런 것에 한창 흥미를 느끼며 자라는 시기다. 어머니는 저 연약한 ‘과학의 싹’을 잘 가꿔줘야 할 의무를 갖는다.
아무리 징그럽고 언짢아도 무럭무럭 자라는 ‘과학의 움’을 예리한 칼로 사정없이 자를 수 있나. “하지 말라”는 말, 그것이 가장 잘 드는 칼, 비수라는 것. 다치지 않을 일이면(정도라면) 무엇이든 “해 보라”고 타이르는 부모, 용기를 주는 어머니의 자식 중에서 노벨상이 나온다. 달걀을 품고 있는 에디슨을 본 어머니가 “너 미쳤냐?”하고 퉁을 주지 않았다는 것을 명심하자. 어쨌거나 아이들은 흙(자연)을 만져야 한다. 자연으로 보내라! 루소가 부르짖지 않았던가,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무엇보다 자연에 가까이 가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가까이 가는 마음’이 ‘관심’일 것이고, ‘가까이 가서 보는 것’이 바로 ‘관찰’인 것이다. ‘가까이’가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른다. 어떤 일에 관심을 갖는 것이 곧 ‘호기심’인 것이요, 호기심은 어린이의 특권일 터. 어린이가 갖는 호기심 그것이 바로 동심(童心)인 것이요, 그런 동심 없이는 자연과 만날 수 없다. 하여 바로 동심은 시심(詩心)으로 통하고 그것이 과학 하는 마음인 과학심(科學心)인 것이다. 결국 과학과 시는(가) 만난다. 다른 말로 시인의 호기심으로 자연을 관찰해야 그것이 제대로 보인다는 뜻이다. 허 참, 철부지 동심에 과학이, 또 시가 들어 있더라!
게다가 덧붙여 해줘야 할 것이 있다. 작은 실험실을 집안에 마련해 주자. 방이 없으면 거실을 써서라도 말이다. 간단한 실험기구를 준비해 주는 것이다. 생물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현미경 한 대 정도는 사 주는 것도 좋다. 비싼 장난감 하나 정도의 값에 지나지 않으니 겁먹을 일이 아니다. 잎사귀 하나, 벌레 한 마리를 잡아서 그것으로 들여다보는 재미는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미지의 세계를 확대하여 들여다보는 재미라니!
어쨌거나 우리나라의 과학 수준도 경제에 비례하여 10위권에 들어가고 있다. 경제가 국력이라면 과학 또한 국력이 아닌가. 아쉽다면, 응용과학은 꽤나 앞서가고 있지만 기초과학은 저만치 뒤처져 있는 실정이다. 아무 쓸모 없어 보이는, 돈이 되지 않는 분야라 사람들이 전공하길 꺼린다. 그러나 기초과학 없는 응용과학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니, 국가에서 이런 점을 인식하고 이쪽에 신경을 써야 한다. 과학 강국들은 하나같이 기초과학이 발달했다는 것을 잊지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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