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평 ‘달빛극장’에서 본 새로운 문화의 가능성
봉평 ‘달빛극장’에서 본 새로운 문화의 가능성
  • 이춘호 / 전 한국여성유권자연맹 회장 , 인하대 객원 교수
  • 승인 2005.09.16 11:46
  • 수정 2005-09-16 11: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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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의 잔인한 교통체증을 감수하면서도 한여름 밤의 달빛과 어우러진 메밀꽃의 신비가 그리워 두 시간 여를 달려 강원도 봉평 ‘달빛극장’에 갔다.
초록빛 들판을 끼고 도는 실개울 따라 올라가니 학교 소나무 울타리를 벗하여 만든 공연장과 넓은 운동장을 하얀 메밀꽃밭으로 가꾸어 놓은 폐교의 활용은 지방 문화의 아름다운 장을 여는 새로운 장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종일 내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 덩어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들꽃 속에서, 파란 밭둑 넘어 피어 있는 새하얀 메밀꽃의 야릇한 신비감 속에서, 건강한 자연인들과의 만남 속에서, 나는 만신창이가 된 도시의 영혼을 훌훌 벗어던지는 상쾌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걱정이 되기도 했다. 이런 산골짜기에 누가 돈을 주고 연극 구경을 하러 올까? 도시 사람들도 공짜 표가 있으면 가끔 가는 연극 공연인데 정말 누가 올까? 완전 적자가 날 텐데 무척 걱정이 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했다. 그러나 저녁 7시 공연이 되기도 전에 손에 손을 잡은 가족들과 연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밭 메다 오는 듯한 옷을 입은 아주머니들뿐만 아니라 머리가 하얀 할머니들도 모여들기 시작했다. 입장료를 내려고 줄을 서는 장면은 더더욱 신기했고 이상하기도 했다.
정말로 문화에 목말라 하는 건가, 아니면 옛날 어린 시절 동네 서커스단 구경 오듯 휩쓸려 온 것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정말로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을 이해하는 사람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순식간에 300석이나 되는 자리가 가득 차고 공연이 시작되었다.
별빛 초롱초롱, 메밀꽃 한들한들, 밤바람 시원한 자연 그대로의 배경을 무대로 연극이 시작되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한 마음이 되어 웃고, 손뼉치고 환호하는 가운데서도 저편에 앉은 시골 할머니들의 손뼉은 그칠 줄을 모른다. 연극을 이해하는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연극에 흠뻑 빠져들어 신나게 손뼉치는 그들이 정말로 부러웠다. 왜냐하면 너무나도 행복한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앞줄에 앉은 젊은 아버지는 어린 딸을 가슴에 안고 아들과 아내는 어깨동무하고 살을 나누면서 소중한 추억을 만드는 친구 같은 가족의 모습은 한국의 가정이 건강하게 살아 있음을 확인해 주는 것 같았다. 또한 한여름 밤의 자연을 벗삼아 사랑을 나누는 연인들의 모습은 해맑고 신선해 보였다.
공연이 끝나고 안내 방송은 더더욱 나를 놀라게 했다. 뒷마당에 삼겹살 바비큐와 막걸리를 마련했으니 모두 함께 와서 즐기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또 다시 놀란 것은 빨리 빨리라는 한국인의 거친 행동은 간 곳이 없고 뒤뜰로 옮겨가는 관객들이 메밀꽃 속에서 사진도 찍고 한여름 밤의 자연을 즐기면서 천천히 걸어가서 음식을 즐기는 모습이야말로 성숙한 시민의식이 우리 국민에게 자리잡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행복한 할머니들의 건강한 모습이, 친구 같은 젊은 가족의 행복한 모습이, 연인들의 신선한 사랑의 모습이, 우리의 미래를 만드는 아름다운 힘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학생이 없어 문닫게 된 시골의 학교에다 문화(연극)와 자연(메밀꽃)을 조화시켜 지방 문화를 열어가는 한 위대한 연극인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참으로 인간적인 생각과 헌신이 문화에 목말라 하는 시골 사람들에게 행복을 흠뻑 주고 있는데 왜 우리의 정치인들은 행복이 준비된 국민에게도 행복을 주지 못할까? 이런 생각이 한여름 밤의 꿈은 아닐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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