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은 내게 ‘숙명’이었어”
종적방연서 5백명 노동자 이끌고 노동항일운동…고문 후 위장결혼으로 출옥
사회주의 독립운동 이력…50년 숨죽여 살다 96년에야 국가유공자로

1919년 3·1운동 발발 1년 전에 태어나 한평생 ‘여성 독립운동가’의 삶을 숙명처럼 여기고 살아온 이병희(90)씨. 그는 16세에 공장에 위장취업해 항일운동을 이끌고, 시인 이육사와 북경망명의열단으로 활동했으며, 이육사 열사가 순국하자 그 시신과 유품을 수습해 국내 유족에게 전달하는 등 독립운동에 한 획을 그었다. 하지만 이씨는 독립운동가였던 사실을 최근까지 숨기고 살았다.

“96년 국가유공자가 될 때까지 50년간 독립운동가였던 사실을 숨기고 살아야 했어. 사회주의 독립운동을 했던 경력이 혹시 후손들에게 누가 될까봐….”

3·1절을 며칠 앞둔 지난 20일, 3·1여성동지회 박용옥 회장, 김옥한 부회장과 함께 이병희씨를 만나 긴 대화를 나눴다. 짧은 커트머리에 양장차림을 한 이씨는 90세란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활동적으로 보였다. 과거를 회상할 때는 여성 독립운동가의 열정이 되살아나는 듯 눈빛이 성성하게 되살아났다.

‘이육사 동거인’에서 ‘독립운동가’로 재조명…96년 애족장 받아

꼭꼭 숨어 살던 이병희씨를 세상에 내놓은 건 어느 방송국의 다큐멘터리 제작팀이었다. 이육사에 대한 프로그램을 제작하던 방송국은 이육사 사망신고를 했던 이병희씨에 대한 기록을 확인하고 의문이 생겼다. 당시에는 ‘이병희’라는 인물의 생존 여부는 물론 그가 여성인지 남성인지, 어떤 역할을 했는지 등 모든 게 불투명했다. 이육사의 유가족을 중심으로 집요하게 추적한 결과, 이병희씨가 이육사 열사의 손녀뻘되는 친척으로 독립운동을 했던 여성이며 현재 국내에 생존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방송으로 이병희씨와 부친 이경식씨의 독립운동 업적이 드러났다. 그 결과 이씨와 작고한 부친 이경식씨는 1996년 애족장을 수훈하고 독립유공자로 이름을 올렸다.    

“그 기쁨이야 말로 못하지…. 사회주의 독립운동을 한 죄로 불이익이 있을까봐 독립운동했던 것도 숨기고 살았는데 늦게라도 훈장도 받고, 독립운동가로 인정해주니 이제 원이 없어.”

이씨의 가족은 전부가 다 애국지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독립운동에 매진한 일가다. 조부 이원식 열사는 이육사와 형제처럼 지낸 사이로 동창학교를 설립해 민족교육을 이끈 독립운동 1세대다. 부친 이경식 열사도 암살단원으로 활동했다.

‘좌파’ 여성 독립운동가로 얼마 전에야 공을 인정받아 건국포상을 수훈한 이효정 여사도 그의 친척이다.

이런 집안의 분위기 때문인지 가부장적 사회에서도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 당연하게 생각됐다는 게 이병희씨의 설명이다.

식민지 현실 벗어나기 위해 ‘여성’ 넘어 독립운동 매진

“내가 여자니까 못한다는 생각은 안했어. 식민지 현실에서 벗어나려면 여자도 당연히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

그는 서울여상 2학년 되던 해에 ‘종연방직’이라는 공장에 위장취업을 하고 500여명의 근로자들을 모아 항일운동을 주도한다. 이씨는 이 사건으로 4년 반 동안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다. 여성으로서 누려야 할 기본적인 권리는 물론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권리까지 박탈당한 채 모진 고문을 정신력 하나로 버텨냈다는 이씨.

이씨는 출옥한 후 더 이상 국내에서는 활동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북경으로 건너간다. 거기서 의열단에 가입하고 이육사 열사를 다시 만난다. 함께 무장투쟁을 준비하던 중 1943년 일경에 걸려 또다시 북경 감옥으로 압송된다. 북경 감옥에서 죽을 뻔한 걸 이육사 열사가 자신을 ‘결혼할 사람’이라고 속여 보호했다는 게 이씨의 설명.

“일본 순사들도 처음에는 이육사 선생의 주장을 믿지 않았지만 계속 주장하니까 그냥 아무나와 결혼하는 조건으로 나만 석방시켜주겠다고 했어. 그래서 지금은 고인이 된 남편을 만나 선을 보고 위장결혼을 하기로 하고는 출옥을 했지.”

이씨는 출옥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이육사 열사가 사망했다는 기막힌 소식을 듣는다.

그는 이육사의 동거인으로 돼 있었기 때문에 손수 육사의 시신과 유품을 챙겨 정리할 수 있었다.

‘광야’ ‘청포도’ 같은 시도 사실은 이씨가 없었더라면 우리에게 알려지기도 전에 사장됐을 것이다.

왼쪽부터 김옥한(아니키스트 김종진선생 막내딸), 이병희 할머니, 박용옥 3·1 여성동지회 회장.
▲ 왼쪽부터 김옥한(아니키스트 김종진선생 막내딸), 이병희 할머니, 박용옥 3·1 여성동지회 회장.
젊은세대 역사 무관심 아쉬워… “3·1운동 정신 영원해야”

그 후 이씨 부부는 곧 해방을 맞게 되고 서울로 돌아온다. 6·25를 겪으며 좌파인 것이 밝혀진 친척 둘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고 이씨는 숨어 살기로 결심한다. 이씨는 건설업을 했던 남편 조인찬씨를 내조하며 아들 하나를 낳고 딸 하나를 입양해 키우며 조용히 살았다. 그렇게 반세기를 보내는 동안 세상이 바뀌었다.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도 인정을 받는 세상이 마침내 온 것이다.          

파란만장했던 삶. 그라고 왜 후회가 없었을까. 하지만 이씨는 여성 독립운동가로서의 삶이 자랑스러웠다고 말한다.

“죽을 고비를 여러번 넘기며 힘들게 살았지만 후회는 없어. 고문에 못이겨서 조금이라도 변질됐다면 조상님들 뵐 면목이 없었을 거야. 그저 나라에 누가 되지 않게, 가문에 누가 되지 않게 행동하려고 노력했지.”

같이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하나둘 스러져가고 젊은 세대들은 점점 역사에 무관심해져가지만 이씨의 ‘독립운동’은 절절한 채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씨는 몇년 전부터 양로원, 종교단체, 사회단체 등을 닥치는 대로 다니며 독립운동 유공자들을 찾고 있다. 같이 활동했던 사람들을 찾아내 독립유공자로 올려주고, 그 후손에게 자랑스러운 조상의 명예와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게 하는 게 이씨의 마지막 과제다.

“요즘 젊은 사람들, 역사에 자꾸만 무관심해져서 안타까워. 이렇게 되면 우리 대에서 독립운동의 기억이 끊기고 말테지…. 젊은이들이 과거 독립운동이 왜 일어났고, 그 정신이 어떠했는지 관심을 갖고 기억했으면 좋겠어.”

몇 안되는 생존 여성 독립운동가 이병희씨의 절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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