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최초 여성 헌법학자
윤후정 이화여대 명예총장 (6) 끝

혼돈 시기 학생보호가 곧 이화의 전통으로

첫 직선총장된 뒤 이화블루오션 개척 시작

윤후정 이화여대 명예총장은 특정 제자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을 상당히 불편해한다. 시기마다, 상황마다 인상적인 추억은 있으나 제자들에 대한 마음은 나름대로 다 각별하기 때문. 그 중 한 기억이 1965년의 한·일회담 비준 반대운동으로 시작된 6·3사태 당시다.

6·3사태, 5·17때 학생지켜

이대에서는 총학생회장이던 진민자 청년여성문화원 이사장·법학과 학생회장이던 차명희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이사장· 법정대 학생회장이던 신인령 전 총장이 주축이 돼 한·일회담 반대운동을 “정말 당차게들” 했다. 1차 유학 직후 법학과 과장서리를 맡았던 그는 과학교육과장인 한상준 선생과 함께 학생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각각 신인령, 진민자 학생을 맡았다. 신인령 학생을 집으로 데려와 보호하다가 차명희 학생과 함께 한일관에 가서 냉면을 사주고 돌아오는 길에 과격학생에 대한 전국 지명수배령이 내렸다는 뉴스를 듣곤 김옥길 선생에게 부탁, 자금을 마련해 학생들을 피신시켰다. 전국학생운동연합이 이대에서 발의되는 등 이대생들이 주축이 돼 한·일회담 반대운동을 전개하면서 펴는 주장과 행동이 “옳고 대견해” 보였기에 이를 적극적으로 만류하지도 않던 차였다.

신인령 학생을 피신시킨 직후 형사들이 들이닥쳐 쌀통 뒤까지 샅샅이 뒤지고 갔고, 학교에서는 사태 수습을 위한 교무회의가 열렸다. 당시 김활란 이사장, 김옥길 선생, 서은숙 총장서리, 이태영 법정대학장이 참석한 자리에 학생들의 보호를 맡았던 그와 한상준 선생이 불려갔다. 그는 문교부에서 주동 학생들을 제적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음을 예감하고, 준비해갔던 사표를 조용히 내밀었다.

“‘나는 이미 대학도 대학원도 다녔고 선생도 해서 나 혼자서도 공부할 수 있고 일터도 찾을 수 있지만, 이 젊은 학생들은 아직 대학도 안나와 여기서 학업을 중단하면 인생에서 회복하기 어려운 고비를 맞는다. 그러니 이 학생들의 제적을 내 사표와 맞바꿔달라.’ 이렇게 호소했지요. 다행히 문교부의 심한 압력에도 불구하고 이들 학생은 논란 끝에 무기정학을 받고 동기생들보다 1년 늦게 졸업했어요.”

법정대 학장이던 1980년 5·17 쿠데타 당시 캠퍼스에서 전국학생회의가 열렸다. 그는 회의에 참석했던 남학생들은 거의 다 도망가고 뒤에 남은 여학생 대부분이 경찰버스에 잡혀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양말도 못신고 작업복 차림 그대로 학교로 달려갔다. 그 곳에서 현장을 지휘하던 경찰서장에게 정의숙 총장과 함께 여학생들을 풀어달라고 호소했다. 이것이 여의치 않자 그 자리에서 서슬 퍼런 보안사로 달려가 학생들의 석방을 간청, 결국 붙잡혀 있던 학생 모두를 총장 공관으로 데려와 저녁을 먹이고 집에까지 데려다준 시절도 있었다.

혼란의 시기, 이처럼 학생들의 희생을 최소화하고 보호하는 것은 이화의 하나의 전통이 되었다.  

법대의 부흥 역시 그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다.

5·17 때문에 한해 늦춰 1981년에 열린 법정대 창립 30주년 기념행사에서 그는 법정대 재건과 발전의 청사진을 제시하면서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었다. 그의 호소는 ‘법정인의 밤’에서 즉시 효력을 발휘, 동창회와 이영회에서 당시로선 상당한 액수인 1000만원 가량을 모금했다. 그 종잣돈으로 우수학생을 유치하고 고시 기숙사인 ‘솟을관’을 만드는 한편, 고시 특강을 열고 장학제도를 마련하는 등 특화 지원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때 지원을 받은 10여명의 학생들 중 연이어 외시(오영주), 행시(황선화)에서 첫 합격생이 나왔고, 다수가 사시에 합격했다.

이 성과를 토대로 정원을 2배가량 증원 요청하면서 이에 걸맞게 우수 교수들을 적극적으로 영입해 “서울대 법대 못지않은” 법대의 모양새를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이런 것이 밑거름이 돼 80년대 중반 이후 다수의 사시 합격생을 배출하기 시작, 2000년 한국대학교육협의회(대교협) 주관 평가에선 ‘전국 최우수 법과대학’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의 후학들은 노동법의 대가인 신인령 전 이대 총장, 여성 첫 법제처장을 기록한 김선욱 이대 법대 교수를 비롯해 박은정 서울대 법대 교수, 최근 한국젠더법학회를 창립한 김엘림 방송통신대 법대 교수, 이주향 수원대 교수(철학),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차명희 이사장과 곽배희 소장, 양정자 대한가정법률복지상담원장, 91년 사시에 수석 합격한 김은미 변호사, 금덕희 판사, 문미란 국제변호사 등 법학계와 법조계에 고루 퍼져 있다. 타 대학 법대 학장을 역임한 후학만 해도 곽상진(경상대), 고정명(국민대), 김숙자(명지대), 오선주(청주대) 등 여럿이다.

90년, 그는 58세에 총장에 선출됐다. “정말 총장이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그는 압도적 지지로 모교의 첫 직선 총장이 됐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엔 60세만 돼도 총장후보가 될 수 없는 것이 관행이었던 때였다. 임기 6년 동안 그는 한계가 없는, 또한 막힘 없는 사고의 바탕 위에서 실사구시의 정신으로 이화의 블루 오션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실례가 세계 여성 교육기관 중 최초로 96년 공대를 설립한 것이다. “통째로 크게 한번 도와주십시오”라는 그의 요청에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이 흔쾌히 응해 100억원 상당의 공대 건물(현 아산공학관)을 무상으로 지어줬다. 당시 정 회장은 “서울대 건물은 국가가 지어주고 연·고대 건물은 남자 동문들이 지어주는데 이대는 누가 지어주겠는가 하고 생각했다”는 말로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95년에는 ‘이화인증원’을 개원했다. 취업 현장에서 요구되는 실무능력 정도를 학교가 인정 보증해주는 국내 대학 첫 시도였다. 이밖에 마이크로소프트사, 한글과컴퓨터사, 한국PC통신 등 정보화에 주력해 다양한 기업들과 활발히 산학협동을 체결했다.  

“나는 이상하게도 성격과 외모와는 다르게 모금을 많이 한 사람이 되었어요.”

그랬다. 그는 총장 재직시 대학발전기금으로 730억원을 모아 주위를 놀라게 했다. 21세기 세계 명문대로의 도약엔 엄청난 규모의 재원이 필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94년부터 모금작업에 박차를 가하면서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 LG그룹 구자경 회장, SK텔레콤 부회장을 비롯한 임원진 등 대기업 관계자들을 힘닿는 데까지 찾아다니며 이대에 대한 지원을 호소해 상당한 성과를 이끌어냈다. 이화-SK텔레콤, 이화-삼성문화관 등의 유형적 결과물도 중요하지만, 경제를 이끄는 중추세력들에게 “이화는 더 이상 60·70년대의 이화가 아니다.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다”는 인식을 확산시킨 것 또한 그에 못지않은 성과였다.

95년 대교협의 대학종합평가인정제 심사 결과 ‘최우수대학’으로 선정된 것은 그의 임기 마무리에 하나의 큰 방점을 찍은 ‘사건’이었다. “사립여대로서의 약점을 극복하고 강점을 최대한 활용해 비약적인 발전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것이 총평이었다.

5회에 걸쳐 총 10여시간을 훌쩍 넘겨 진행한 그와의 인터뷰에서 기자가 가장 강하게 받은 인상은 먼 미래를 전망하고 비전을 설정하는 선지자적 정확함, 그리고 일을 추진하는 열정이었다. 그 스스로도 이미 80년대에 “여성의 시대가 온다는 것을 감지”하였기에 “전문직업성을 많이 강조하고, 전공과 실제 직업을 연결시키는 교육을 해야 한다”고 늘 주장해왔다.

“나는 정말로 이화를 소중히 생각해왔고, 나아가 끊임없이 한국 여성의 미래에 대해 고민해왔지요. 그리고 그것이 마침내는 민족 사랑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평생 보람이었습니다.”

엔사이클로피디어 브리태니카는 1999년 ‘세계연감’에 “20세기 여성계의 가장 이상적 인물”이라고 그를 규정하면서 “20세기 한국 여성운동의 역사에서 윤후정은 그 누구보다 공로가 큰 여성계 지도자로 기억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은경 기자 pleun@womennews.co.kr

<여성신문 기자·20주년 기념사업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