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그 호두나무는 사라질 위기도 여러번 겪었다. 5년 전인가, 서울에서 왔다갔다 할 때였다. 주말에 시골집에 도착해보니 아니 나의 호두나무가 보이질 않는다. 아버지가 동네사람들에게 부탁하여 밑둥만 남기고 몽땅 잘라버린 것이다.
"왜 짤랐어? 내가 저 호두나무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나는 통곡했다. 그러나 나의 호두나무는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다음해 봄이 되니 다시 새 잎이 나오고 가지를 키우더니 더욱 더 무성하게 자라나는 것이었다.
13년 전 이곳에 터 잡을 때 나는 이 호두나무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 어려서 보았던 TV 외화 시리즈 '초원의 집'이 생각나서였다. 그 영화에 주인공인 세 자매가 사는 곳이 바로 호두나무골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매일 뛰어노는 들 가운데 커다란 호두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우리 밭의 호두나무는 생김새나 주변의 모양이 스케일은 좀 작지만 초원의 집의 그것과 아주 흡사했다. 나도 그 세 자매같이 맑고 순수하고 아름답게 그 밑에서 뛰어다니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호두나무 밑은 너무나 시원하여 여름에 밭일 하다가 그 밑에 누우면 솔솔 부는 바람이 정말 달았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동네분들이나 어머니가 잘라버리자고 하는 말도 일리는 있다. 말이 호두나무지 사실 13년 동안 호두를 한번도 따보질 못했다. 호두가 열리지를 않아서? 천만에! 호두는 무지무지 많이 열린다. 부지런한 청설모와 담비에게 모조리 도둑맞아서다. 어쩜 한개도 남기지 않는다. 호두는 백로가 지나면서 따는데 그 이전에 이미 호두나무에 호두는 없다. 그러니 밭에 그늘만 지고 따먹지도 못하는 호두나무를 무슨 이유로 둔단 말인가? 나의 호두나무가 지금까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풀각시의 지독한 사랑의 힘이었다. 그런데 올해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9월8일 백로, 호두가 그대로 달려 있다!
"아무래도 청설모계에 무슨 일이 있어. 틀림없어.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호두가 남아있을 리가 있나?"
옆집 이성구씨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호두 구경도 못해오다가 올해는 이상하게 아직도 달려 있는 호두를 보며 신기해했다. 우리집 호두나무는 어찌나 많이 달렸는지 가지가 땅에 닿았다. 호두 무게를 못이겨 부러진 가지도 있다. 알알이 잘도 영글었다. 이미 겉껍질이 벌어져 속을 드러낸 호두들은 바람만 불어도 후두둑 후두둑 땅으로 떨어져내렸다. 다음날 아침에 가보면 땅에 떨어진 호두도 건드리지 않은 채였다.
"빨리 따자! 청설모들이 언제 습격할지 모르잖아."
옆집은 벌써 장대 들고 나섰다. 아저씨는 나무 위에서, 아줌마는 나무 아래에서 가지를 치면 후두두둑 후두두둑, 비오듯 쏟아진다. 10년 만에 처음 만져보는 호두에 아저씨도 아줌마도 신났다.
"나도 빨리 따야겠네…."
나도 장대 들고 호두나무로 갔다. 어찌나 많이 매달렸는지 이틀 동안 땄는데도 아직 반도 더 남아있다.
"그래도 좀 남겨두는 게 좋겠지? 갸들이 얼마나 섭섭하겠어."
울 엄마도 신났다. 10여년 만에 처음 만져보는 호두니까…. 호두는 잘 영글어 망치로 한번만 치면 바로 벌어진다. 무엇보다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이 생겨 참 좋다. 겉껍질 벗겨낸 호두는 물에 박박 씻어 햇빛에 말린다. 한 5일 말려야 맛이 더 고소해진다네…. 마당에 발 깔고 호두를 널어놓으니 가을 햇살이 가득 내려앉는다.
"가을 빛깔 참 곱다."
이틀 동안 호두와 씨름한 내 손은 호두 물이 들어 새까맣다.
"손이 그래서 어떡하냐?"
엄마는 걱정이 크지만 나는 이제야 농사꾼 손으로 보여 참 좋다. 검갈색 손 빛깔도 역시 가을 빛 같아 더 좋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올해 청설모 세상에 전염병이 돌았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