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적 페미니즘 거부한 페미니스트
"여성의 행동은 설혹 그것이 잘못됐더라도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남성에 대한 승리로 여겨졌다. 여성운동은 자기비판이 약했다."
<2006년 10월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도리스 레싱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인 1950년에 발표한 첫 작품인 '풀잎은 노래한다'를 시작으로 20세기에 발생한 거의 모든 이슈를 작품에서 다루어왔다. 인종차별, 세대간의 갈등, 남녀관계, 예술창작의 문제, 정치문제, 정신분석에 이르기까지, 사실주의적 작품에서 메타픽션(예술창작 과정에 대한 소설), 공상과학소설을 포괄한다. 특히 레싱은 결혼과 성에 천착한 여성문제를 잘 짚어냈다.
레싱은 1954년에서 최근까지 서머셋 모옴 상을 비롯해 왕립협회 문학상, 데이비드 코헨 문학상 등 유럽과 미국에서 15개의 상을 받았다. 노벨상은 그녀가 가장 늦게 16번째로 받은 상이다. 레싱은 올해에도 영국의 배스 문학축제에 초대받아 올해 출판한 자신의 저서 '클레프트(Cleft)'를 읽은 독자들의 다양한 질문에 답변을 하는 등 아직도 왕성한 작가활동을 하고 있다. 미국 오스틴의 텍사스주립대학 인문학연구소에 거의 45상자에 해당하는 레싱의 문학자료가 보관되어 있다.
레싱은 1919년 지금의 이란(페르시아)에서 태어나 1949년 30세에 영국으로 돌아올 때까지 짐바브웨(남 로디지아)에서 성장했다. 레싱의 아버지는 1차대전에 참전해 다리를 다친 장교이며, 어머니는 부상당한 아버지를 치료하던 간호사였다. 부모와 함께 남 로디지아로 이민을 떠났던 레싱은 우수한 학생이 되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강요와 청교도적 사고에 대한 반항으로 14살 이후 학교를 중단하고 독학으로 많은 양의 독서를 하게 된다. 이러한 독서는 세계적인 여러 작가들의 작품을 포함했으며, 작가수업에 커다란 도움이 된다.
첫 결혼 이후 1942년부터 아프리카에서 공산주의 활동에 탐닉하던 레싱은 공산주의에 대한 강한 신념으로 남편과 자녀를 떠나 독립하며, 이후 두번째 결혼도 이혼으로 끝나게 된다. 1950년 첫 작품인 '풀잎은 노래한다'를 시작으로 런던에서 작가생활을 한 이후에도 레싱은 공산당 활동을 계속하다 1952년 5부작인 '폭력의 아이들' 시리즈인 '마사 퀘스트'를 쓰게 된다. 공산당에 대한 환멸을 겪은 이후인 1962년 '황금 노트북'을 출판해 굉장히 좋은 반응을 얻는다. 이 작품에서부터 그는 정신분석학과 수피즘(이슬람교도의 일부가 신봉하는 일종의 신비주의)을 작품에 도입했고, 중년여성의 심리상태를 탁월하게 묘사하는 작품을 쓰게 된다.
1979년에서 83년까지 레싱은 '아르고스의 카노푸스 왕국' 시리즈를 시작으로 공상소설을 쓰면서 인간의 문제들을 재조명하게 된다. 그는 제인 소머즈라는 익명으로 작품을 발표하기도 한다. 또 '피부 아래에서(1994)' '그늘 속을 거닐며(1997)' 같은 자서전을 출간한다. 최근까지도 '가장 달콤한 꿈(2001)' '할머니들(2003)' '클레프트(2007)' 등을 출판함으로써 청력장애로 고통받는 88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한계가 없는 창조력을 보여주고 있다.
가부장사회 여성문제 고찰
첫 소설 '풀잎은 노래한다'에서 레싱은 농업문명과 산업문명의 갈등, 원주민과 백인 지배계층 사이의 흑백갈등과 같은 사회적 차원의 갈등을 짚어낸다. 또 주인공 메리와 그녀의 어머니를 통해 가부장제 사회, 결혼과 성에 관련된 여성문제들을 고찰한다. 이 작품에서 레싱은 사회의 지배적 억압구조를 의식하지 못하던 여주인공이 점차 남아프리카 사회와 같은 권위주의적 사회가 여성에게 가하는 압력을 서서히 깨달아가는 과정을 심도 깊게 추적한다.
레싱은 성을 인간 실존의 핵심으로 간주하고, 낭만적 사랑에 대한 환상과 결혼제도에 대한 비판을 전개한다. 메리의 성적 불감증은 수동적이고 고갈된 사회의 상징으로 간주된다. 레싱은 메리의 성의 문제를 기초로 해 그녀가 참다운 인간관계를 맺지 못하는 과정을 탐색한다. 30대가 돼서도 그녀는 남성을 자신의 안전을 위협하는 공포의 대상으로 느끼지만, 주위의 비판적인 시선에 불안을 느끼고 사회적 기준에 맞는 자신의 모습을 만들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서 결혼을 감행한다. 메리의 남편인 리처드 역시 환상과 사회적 압력에 순종하려고 결혼을 택한다. 이들의 결혼생활은 파국으로 치닫고 결국 메리는 성차별과 인종차별의 이중적인 패턴의 굴레에서 정신분열에 빠지게 된다.
사회구조와 여성문제의 메커니즘을 고찰한 것은 그의 대표작 '황금 노트북'에도 잘 드러난다. '황금 노트북'은 2차대전, 냉전체제, 스탈린시대와 탈 스탈린시대 등 1940년대와 60년대의 격변기를 배경으로 한다. 작품에는 현대의 여러 혼돈스런 상황으로 인해 정신분열과 창작장애로 고통을 받고 있는 애나라는 여성작가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레싱은 작가를 주인공으로 인생과 작품간의 복합적 관계를 제시하고, 외부세계의 분열과 파괴가 주인공의 내면의식 속에 투사되는 과정을 통하여 개인의 문제와 사회의 문제가 밀접하게 연결됨을 시사한다.
주인공 애나는 노이로제를 겪고 있는 자신의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자신의 인생에 대해 각각의 주제별로 4개의 노트에 기록한다. 소설의 구조는 현재 애나가 경험하고 있는 내적 분열을 강조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4가지 색깔(검정, 파랑, 빨강, 노랑)의 노트와 일인칭 소설인 '자유여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4가지 색깔은 애나 인생의 4가지 분야인 정치, 사랑, 예술, 여성적 경험을 네 조각으로 분리해서 전달해준 것으로, 독자들은 연속적 문맥을 차단당한 채 분열과 혼돈된 상황을 체험하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황금 노트로 통합되는 경험을 한다.
이밖에도 레싱은 첫 작품 '풀잎은 노래한다'에서부터 '마사 퀘스트'를 비롯한 '폭력의 아이들' 시리즈, '황금 노트북' '어둡기 전의 여름' '생존자의 비망록'에 이르기까지 모녀관계에 대한 다양한 고찰을 시도한다. 레싱은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깊은 반감을 초기작품 '마사 퀘스트'의 주인공 마사를 통해서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하지만 후기작인 '사대문의 도시'에서 주인공 마사가 콜리지 가족의 대리모로서 억눌린 자아를 회복하고 진정한 영양공급자로서의 역할을 하는 모습을 통해 모성과 화해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레싱은 혈연관계상 모녀 대신에 서로 다른 가족구성원간의 모녀관계를 이상으로 제시하기도 한다. 부정적 패러다임으로서의 모녀관계 대신 과거와 현재가 미래의 발전으로 이어지는 이상적, 정신적 모녀관계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고통과 시련으로 획득된 어머니 세대의 인생관은 딸의 세대가 시행착오를 방지하고 성숙한 의식을 획득하게 함으로써 역사의 역동적 발전에 기여하는 역할을 한다.
진정한 인간애로의 역사의식 강조
레싱은 페미니스트로서 자리매김하기를 거절하지만, 그의 작품에서 어떠한 작가보다도 여성들이 처한 억압적 상황을 제시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을 다양한 인간관계 속에 적시하고 있다. 그는 백인여성들의 여권운동이 어떤 이데올로기에 집착해서 여성들만의 이익을 옹호하는 편협한 의미의 여권운동으로 축소되는 것을 지양한다. 또 남성과 여성, 백인과 흑인, 부모와 자녀의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배제하고, 한 인간으로서 고통받는 동료인간에게 손을 내미는 진정한 인간애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역사의식임을 강조하고 있다.
레싱은 우리가 남성과 여성이라는 구분을 넘어서서 동료 인간들의 의식을 깨우치고 기득계층을 계몽시켜서 갈등과 반목으로 경직된 인간관계를 개선하기를 희구한다. 이런 개인들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간들이 아니라 평범한 개인들이 성장, 발전, 진보를 하는 과정을 묘사한다. 그는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배운다는 것이다"라고 언급했듯이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면서 인식을 얻어가는 과정을 중요시한다. 한 개인 개인이 자신의 존재를 상실할 정도의 고통을 통해 깨달아가는 인식을 바탕으로 이웃을 변화시키는 역동적 역할을 하기를 요구한다. 레싱의 표현을 빌리면 "이 세계에 살고 있으되, 그 세계의 일부가 아닌", 즉 현실세계보다 한 차원 더 높은 삶을 성취하기를 촉구하고 있다.
레싱은 결코 등장인물들의 삶에서 용이한 미래를 제시하지 않는다. 이들은 종말로 치닫는 도도한 파괴의 물결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럼에도 그는 등장인물들의 삶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발전을 향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고 동료 인간들의 의식을 깨우치는 고통스런 작업을 감당하기를 촉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