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촛불이 꺼졌다"
누리꾼들 온라인 추모행렬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이 향년 87세의 나이로 지난 16일 선종했다. 고(故) 김수환 추기경은 1969년 한국인 최초로 추기경에 서임됐으며, 지난 40년간 가난한 자와 약한 자, 고통 받는 자들의 편에 서왔다.  빈소가 마련된 서울 명동성당 대성전에는 18일 밤까지 24만 명이 넘는 조문행렬이 이어졌다.

인터넷 게시판과 카페 등에서도 고인에 대한 추모행렬이 이어졌다. 누리꾼들은 “세상을 밝혀주던 또 하나의 촛불이 꺼졌다”며 애통해 했고, “종교는 다르지만 존경해왔다. 부디 하늘나라에서도 우리나라를 보살펴 주시고 축복해 주세요”라고 추도했다.

외신들은 그를 일컬어 ‘민주주의를 수호한 정신적 지도자’라고 보도했다. 실제로 고 김수환 추기경은 민주화 투쟁에서 정치적 억압에 맞서 자신의 의견을 표명하는 데 망설이지 않았다. 지난 1980년 5·18 광주 민중항쟁 당시 군부의 무력 진압을 온몸으로 막겠다는 비밀편지와 현금 1000만원을 광주 가톨릭 사제에게 보냈던 사실이 29년 만에 공개되기도 했다.

누리꾼들 사이에서는 고인의 이념적, 정치적 행적과 관련해 다소 논란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대체로 “70~80년대 민주화 과정에서나 그 이후로도 김수환 추기경은 흔들림 없는 우리 사회의 안식처였다”며 “지금 같은 어려운 시기에 이런 분을 떠나보내니 더 착잡한 심경”이라는 추모의 글이 이어졌다.

고 김수환 추기경의 ‘아낌없는 사랑 실천’도 주목을 받았다. 그는 생전에 한마음한몸 운동본부를 결성해 사랑의 장기기증 운동과 백혈병 어린이 돕기 운동 등을 펼쳤으며, 성가정입양원을 설립해 미혼모 출산아의 국내 입양을 추진, 20년간 매년 100명씩 총 2000여 명의 아기에게 새로운 가정을 찾아줬다. 이로 인해 입양과 기금 모금에 대한 관심이 크게 늘었다.

그는 생계가 곤란한 노인에게 명동성당 언덕 밑에서 성물(聖物)을 팔 수 있도록 배려하고, 가수 인순이와는 ‘아버지와 딸’처럼 지냈을 정도로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고 한다. 철거민부터 복지시설 운영자까지 어려운 이들이 자신을 찾아와 도움을 요청할 때 그는 “내가 은행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곤 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고 김수환 추기경은 생전에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평생 옹기와 포목을 팔고 다니며 5남 3녀를 키운 어머니를 꼽았다. 그는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많이 입에 올린 말이 ‘사랑’이다. 그러나 고백하건데, 어머니가 보여준 사랑처럼 ‘모든 것을 덮어주고, 믿고 바라고 견디어내는’ 사랑을 온전히 실천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운전기사로 30년간 고 김수환 추기경을 모신 김형태씨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세상 누구에게나 꼭 필요하고, 격식을 차리지 않고 편하게 먹을 수 있는 밥과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고 말씀하셨다”고 전했다.

그는 병상에서도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장례식을 소박하게 치러달라고 신신당부했다고 한다. 남기고 간 재산도 거의 없다. 오히려 안구 기증을 통해 두 사람에게 빛을 선물로 남겼다. 누리꾼들은 “고인은 우리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성찰하도록 하는 계기를 주었다”며 애도했다.

일부에서는 선종을 애도하는 국민 정서를 헤아리고, 경제 한파를 비롯한 각종 사회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국민들의 마음을 한 뜻으로 모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차원에서 장례를 국민장으로 치르자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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