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아이들에 대해 어느정도 알고 있어야 하고 어느 정도를 모른 척해야 되는 것인지 그리고 그런 일들에 대해 아이들의 엄마들은
어느정도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인지 알지 못해 입을 다물밖에. 교양있는 엄마가 되기도 어렵고 교양없는 엄마가 되기도 어렵다.

수능 모의고사인지 뭔지 보러 가는 날 아침, 아이는 책가방속에서 1만원짜리 한 장을 꺼내 보이면서 이 돈으로 시험 끝나고 좀 놀다오면 안되겠느냐고 했다. 미술 준비물 사라고 준 돈인데 아직 사러갈 시간을 못냈으니 시험 끝내고 용돈으로 쓰겠다는 것이었다.

“그래, 그런데 아예 중간고사 끝내고 놀면 안돼? 1주일 뒤에 중간고사라면서 그것까지 끝내고 마음 편하게 놀지.”

기어코 엄마 티를 내고 말았다. 그랬더니 “그럼 난 미쳐 버릴거야. 시험 끝나는 날 놀지도 않고 1주일 동안 또 시험 공부를 한다고 생각좀 해봐”하는 것이다.

아차, 하기는 그렇지. 애들도 숨 좀 쉬고 살아야지. “그럼 친구들하고 아이스크림이나 사먹고 좀 놀다 와”라고 교양있게(?) 슬쩍 물러섰다. “아이스크림이요?”하며 아이는 웃을듯 말듯 했다. 나도 알고 있었다. 아이스크림 정도로 어차피 끝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중3때까지는 어발이의 시험이 시작되면 내가 하는 일은 통신에 들어가 영화표를 네장쯤 예약하는 일이다. 시험이 끝나는 날로 친구들과 몰려서 극장에 가겠다는 아이를 위해. 내가 ‘가우자리’(영화예약 통신)에 가입한 것도 사실 어발이 때문이다. “아들이 시험 끝나고 영화좀 보겠다는데 엄마가 표좀 사주면 안돼?”하고 당당하게 요구하는 바람에 표 사러갈 시간은 없고 할 수 없이 생각해낸 묘안이었다.

시험 끝나는 날 전날밤에는 ‘가우자리’카드 챙기고 할머니, 아빠, 엄마에게 골고루 용돈을 받아 챙긴다. 시험이 끝나자 마자 극장으로 내닫겠다는 속셈으로. 그런데 이번에는 영화표 예약하라는 소리는 안했다. 1주일 뒤 또 시험이 있으니까 극장까지는 안갈 모양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웬걸. 시험끝나고 친구들하고 놀고 있다고 연락을 취하고는 저녁 9시쯤 영화까지 한편 보고 기분좋은 얼굴로 들어왔다.

“무슨 영화 봤는데?”

“스타워즈.”

“여럿이서?”

“셋이요.”

거기까지에서 끝낼까 하다가“누구랑?"하고 물어버렸다.

“○○랑 □□랑 셋이요.”

남학생 둘이서 여학생 한명을 ‘모시고’ 영화를 보고 온 것이다. ‘야 너희들 벌써부터 샌드위치 데이트냐’ 속으로만 생각하면서 그래 재미있었겠다 정도로 끝낼려고 했는데 아이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영화를 보고 있는데 세명의 삐삐가 몇 분 간격으로 동시다발로 울어댔다는 것이다. 모시고 간 여학생의 어머니께서 삐삐를 친 것이었다.

“아니 어떻게 알고? 그애는 어머니한테 자기반 남학생 삐삐번호까지 가르쳐주냐?”

별 착한애도 다 보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같은반 여학생 한명이 셋이서 어울려 나가는 것을 보고 그 ○○네 집에 전화를 한 것이었다. “○○아직안왔어요?”라고. 그렇잖아도 시험 어떻게 봤을지 궁굼한 엄마는 눈이 빠지게 기다렸을테고 딸애 친구의 전화가 너무 반가웠겠지…. 거기다 ○○가 남학생 둘이랑 함께 영화까지 보러간 것 같다고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준 것이다. 덧붙여 같이간 두명의 삐삐 번호까지. 당연히 ○○ 어머니는 자기 딸의 삐삐에 빨리 집으로 연락하라는 음성 메모를 남겼고. 그러다가 안되겠다 싶어 급한 마음에 두명의 남학생에게까지 삐삐를 쳐서 메모를 남긴 모양이었다. “우리 ○○, 너희랑 같이 있으면 빨리 집으로 오라고 해줘… 어쩌구…”하며.

그 음성 메모를 받고 당황해 했을 어발이의 표정은 생각 만해도 웃음이 터졌다. 셋이서 영화를 보고 나와서 음성메모를 체크하고 셋이서 모두 황당해 하면서 어떻든 좀 빨리 집으로 오게된 모양이다. 내가 그랬다면“교양 좀 있으시지…”불평을 했을텐데 그래도 남의 엄마한테는 그런 말은 안하고 머리만 긁적거렸다.

중학교때까지만 해도 아이가 시험 끝나고 영화보고 오면 영화도 보고 오늘은 얼마나 행복해 했을까 생각하고 얘가 왜 빨리 안오지, 종로3가는 중3에게 너무 건전치 못한 거리야, 어쩌구 생각을 하다가 이 아이가 혹 용돈을 뺏기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으로 끝났는데, 이제 걱정이 하나 더 늘어난 셈이다. 여학생하고 영화보다가 여학생 엄마한테 호출 당하는 일이라도 생기지 않을까 하고.

“그런데 ○○집에 전화한 애는 누구야?”

“아, △△ 있잖아요? 우리집에 맨날 전화해서 □□를 소개해 달라고 하는 애요. 걱정된다니까요. 성적은 바닥에 자기를 좋아하지도 않는 애 소개해 달라고 조르고.”

이야기를 듣고보니 사춘기를 딱하게 겪고 있는 아이가 있는 모양이다. 며칠 뒤 반 어머니모임에서 삐삐를 친 ○○엄마를 만나게 되었다. 어발이랑 ○○랑 영화도 보고 삐삐도 쳤으니까 당연히 무슨 이야기가 있을 것 같았는데 아무 이야기도 없이 인사만 했다.

어쩌면 엄마인 내가 모르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섣불리 이야기를 안하는 것 같아 내가 선수를 쳤다.

“어발이 녀석 ○○ 데리고 영화까지 봐가지고 삐삐 받았다면서요”그랬더니 그때야 “알고 계셨어요? 그런 얘기도 해요?” 그러면서 마음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처음에는 남자애가 엄마한테 영화 보러간다는 이야기까지 하고 다니겠나 생각했던 것 같다. “급한 김에 전화하고 생각하니까 그럴 일이 아닌데 싶어서 너무나 미안했어요. 거기다가 어발이랑 친구 □□가 우리애랑 같이 있는데 곧 집에 갈거라고 전화까지 했더라구요.”

“아, 그랬어요?(나한테는 그이야기는안했는데. 제법이야.) 그 정도면 샌드위치 데이트할 정도의 신사도는 갖췄네요”하며 둘이서 마주보며 웃었다.

그러나 사실은 뭔가 이야기를 나눠야 할 엄마는 ○○네집에 전화한 △△ 엄마일 것 같은데 우리는 아무도 그 일을 입밖에 내지 못했다. 우리가 아이들에 대해 어느정도 알고 있어야 하고 어느정도를 모른척해야 되는 것인지 그리고 그런 일들에 대해 아이들의 엄마들은 어느정도 이야기를 할 수있는 것인지 알지 못해 입을 다물밖에.

교양있는 엄마가 되기도 어렵고 교양없는 엄마가 되기도 어렵다. 학부모회의가 끝난 뒤 어느 엄마가“아들들 엄마들만 따로 모입시다”고 소리쳤다. “서로 정보도 나누고”하며 또 다른 아들 엄마가 덧붙였다.

흥미롭게도 아들들 엄마들은 자기들끼리만 나눠야 할 정보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말하자면 좋은 대학 보내기위해 나눠야 할 정보들. 많은 일들에 대해 엄마들은 모르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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