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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사 고은광순 씨(46)는 작년 11월에 몇몇 사람들과 함께‘호주

제 폐지를 위한 시민의 모임’을 만들었다. 그는‘부모성 함께 쓰기

운동’과 ‘호주제도 철폐운동’에 누구보다도 열성적이다. 시민의

모임은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들도 참여하고 있고, 대학생, 전업주부,

직장인, 여성학을 공부하는 사람 등 10여 명이 모여 일주일에 한번

씩 정기적으로 만나 자료집을 만들고, 기획도 하고 있다.

“호주제는 모든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는 것과 여성은 남성의

대를 잇는 도구라는 게 행간에 숨어있는 악법이에요. 국가가 국민을

관리파악하고자 하는 공문서인 호주제도 때문에 국민들로 하여금 대

가 끊어진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게 만들고 여아보다 남아를 선호

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어요. 호주제가 폐지되지 않으면 우리사회

는 21세기를 맞이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요. IMF위기라고 말하지

만 정말 서로 존중하는 가정은 위기에도 그리 크게 흔들리지 않아

요. 그러나 위계질서 하나로 버텨온 집, 아버지의 큰 소리로 버텨온

집은 쉽게 불신하게 되고 무너지게 되는 법이죠.”

그래서 그는 호주제도 폐지가 IMF라고 뒤로 처질 주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 아이 성별이요? 그냥 아이 둘에요.

자신이 운영하는 한의원에서도 고은광순 씨는 호주제가 왜 폐지돼야

하는지, 부모성 함께 쓰기운동의 취지가 무엇인지에 관한 전단을 만

들어 비치하고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나눠준다.

“대부분 반응들이 좋아요. 남자분들도 의외로 좋은 취지인 것 같다

고 말하고, 젊은 사람들 중에는 자기 회사 통신망 위에다 올려 놔야

겠다고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의 남편도 ‘부모성 함께 쓰기 운동’ 발기인에 동참을 할 정도

로 적극적으로 이 일을 지지하는 남성에 속한다.

“나한테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많은 남자들이 답답하다고 말하고,

젊은 여성들도 결혼과 함께 코 앞에 닥칠 일인데 무관심한 걸 보면

안타깝다고 말해요.”

이처럼 열린 사고를 가진 남편이지만 아내에 대한 불만은 있단다.

바쁜 활동으로 늦게 들어오는 일이 많다는 것.

고은광순 씨는 중학교 1학년, 초등학교 4학년에 다니는 두 자녀가

있다. 하지만 그는 남들에게 절대 아이들의 성별을 이야기하지 않는

다. 우리사회가 불평등한 사회라 성별을 묻는 것 자체가 이미 편견

을 가지고 묻는 것이기 때문이란다.

“누가 아이를 낳으면 산모와 아이가 건강하냐고 묻는 사람이 아무

도 없고, 그저 아들이냐, 딸이냐를 묻는 사회잖아요. 예전에 내가 동

네 아줌마들이랑 지나가다가 놀이터에서 불량스러워 보이는 10대 남

학생이 콜라병을 깨뜨리고 가는 걸 목격하고 가서 유리조각을 줍도

록 시킨 적이 있어요. 그런데 아줌마들이 아들엄마는 역시 다르다고

말하더라구요. 여성 자체로서 뭘 한다거나 그냥 아이들의 엄마로서

뭘 한다는 걸 생각하지 못하고 사람들은 편견을 가지고 생각하는 거

예요.”

그는 아이들을 키울 때도 성차별적인 편견없이 키우려고 노력을 많

이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엄마 한 사람의 힘만으로 될 수 있

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단다.

“TV나 가정 밖에서 보는 게 있고, 할머니가 집에 오면‘계집애나

우는 거지 사내 대장부는 우는 게 아니다’라는 등의 말을 하는 걸

듣고 하니까 아이들에게도 편견이 생기기 마련이죠. 아이들이 어릴

때였는데, 시내에서 여성운전자를 보고 ‘어, 여자도 운전을 하네’

라고 하는 거예요. 그때 느꼈죠. 자기 부모만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

라 사회 전체가 성평등적으로 바뀌어야 된다는 걸요.”

이화여대 사회학과 73학번인 고은광순 씨는 서슬이 퍼렇던 유신 정

권 아래서 감옥신세와 대학에서 제적, 복학이라는 우여곡절을 겪어

야 했다.

“성인들의 사회는 완벽한 줄 알고 그걸 배우기 위해 사회학과에 들

어갔는데, 군사독재정권을 보고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죠. 유인물을

후배에게 전한 것과 시위를 준비하는 후배에게 검은 리본을 준비하

라고 말한 것 때문에 감옥에서 칼잠을 자야 했어요. 10.26 사태 이후

복권과 함께 학교에 복학을 했지만 군사정권의 등장으로 또다시 제

적이 되고 말았고, 그러던 중에 요통이 생겨 고생을 하다 침을 배우

게 됐어요. 그때 든 생각이 험난한 세상에서 혼자 살아나가기 위해

서는 전문면허가 필요하다는 거였죠. 그래서 한의학과에 들어가기로

맘을 먹었어요.”

학생운동으로 제적, 서른에 한의학 시작

대학에 가기 위해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 학원을 다니며 공부를 해

야 했는데, 그때 입시학원에서 같은 만학도로 만난 사람이 남편이다.

대학을 6년간 다니면서 결혼을 했고, 아이들도 낳았다. 대학재학중엔

남편과 떨어져 살아야 했고 고정수입도 없어서 많이 힘들었지만, 졸

업즈음엔 남편이 새로 시작한 사업을 궤도에 올려놓게 되면서 차츰

나아졌다.

“92년에 한의원을 개원했어요. 어느날 우연히 한의원으로 들어온

약사들 대상 신문에‘한약 조제법 우편으로 공부 가능, 일주일 2-3

번 석달 완성’ 등의 광고를 보게 됐어요. 그렇게 섣부르고 위험하

게 조제된 한약이 시중에 돌아다니게 된다면 큰일이라고 생각돼 스

크랩을 하고, 동료한의사들과 함께 보건사회부와 국회를 찾아다녔

죠.” 그것이‘한·약사법분쟁’의 시작이 되었고, 그는 삭발까지 감

행했다.

그 전까지 여한의사회는 대사회적 활동이 거의 없었는데, 약사법

투쟁의 과정에서 연대하면서 사회의식이 고양되기 시작했다. 태풍의

눈처럼 커지게 돼 전국 조직으로 확대됐고, 여한의사 회보도 만들게

되었다. 고은광순 씨는 회보에 특집기사로‘아들 낳는 처방에 대한

문제제기’를 다뤘다.

“한의원에 스무 번씩 낙태를 하고서 아들 낳게 해달라고 찾아오는

사람도 있고, 딸 일곱을 낳고 지금 쫓겨 나게 생겼다고 오는 사람,

종가집이라서 첫번에 아들을 낳아야 된다는 사람 등등을 보았어요.

눈물을 흘리고 한숨을 토하는 여성들을 보며 개인적인 설득이라는

것은 소용이 없다는 것을 느꼈죠.”

그래서 의료인의 양심문제보다 더 중요한 건 정부의 적극적인 제도

개혁이라고 생각해, 여연과 97년 ‘남녀성비불균형과 해결방안’에

관한 토론회를 개최하였다. 거기서 10대과제를 선정했는데, 1순위를

호주제 폐지로 결정했다. 그후 3.8여성대회때 본격적인 법개정운동에

앞서 문화운동으로 ‘부모성 함께 쓰기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그

때부터 그는 바쁘게 여기저기 뛰어녔다. 이 운동을 홍보하기 위해

자비로 배지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등 그야말로 호주제 철

폐를 외치는 전도사가 되었다.

고은광순 씨의 운동무대는 실제공간뿐만이 아니다. 사이버공간, 통

신상에서도 그는 바쁘다. 한약사법 분쟁 때 통신을 처음 알게 됐다.

모르면 몇 번이고 전화로 물어보는 끈기로 통신을 이제는 자유롭게

할 수 있단다.

그는 우연히 안기부의 통신마당에 들어갔다가 안기부 직원과 논쟁

이 붙기도 했다. 계속된 논쟁중 안기부방의 조회수만 높여주는 것

같아 하이텔 플라자로 나왔는데, 그것을 계기로 전두환, 노태우의 처

벌을 요구하는 ‘안기부에서 나온 아줌마 이야기’를 6개월 동안 올

리게 됐다.

“대부분 신세대인 네티즌들에게 과거 박정희가 무엇을 했는지, 전

두환 노태우가 무엇을 했는지, 안기부가 어떤 곳인지에 대해 알려주

고 싶었죠. 과거에 눈감으면 미래를 볼 수 없잖아요. 어두웠던 과거

시절에 대해 전해주는 역할을 하고 싶었어요.”

불의를 못 참아 별명 ‘잔다르크’

그는 항상 불의에 대해 못참는 성격이다. 그래서 별명도 ‘잔다르

크’다. 어려웠던 한의학 공부시절 장학금을 받고 다니던 대학에서

학생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 학교 당국에 대한 항의시위에 감히 나

섰다가 그는 장학금의 기회도 박탈당했다. 87년 대선때는 혼자서 자

취하던 대전에서 투표날 부정선거를 막기 위해 홀로 피켓팅을 하는

극성에 파출소소장까지 출동을 해야 했다.

“나 나름대로 옳은 것에 대한 신념을 지키며 살 수 있었던 건 어머

니의 말대로 산 덕분인 것 같아요. 어려서 어머니가 항상 ‘웃지도

말고 울지도 말아라’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말처럼 성장하면서 흔들

리지 않고, 바람에 휩쓸리지 않고 안정된 나 자신을 가지려고 노력

했던 것 같아요.”

그는 오빠와 남동생에 낀 넷째딸로 집안에서 늘 불평등에 대한 불

만을 안고 살았다. 그러면서도 은연중 남성중심 문화가 자신에게도

내면화돼 있었다는 걸 알았다고 한다.

“20여 년전 친구와 길을 가다가 뒤에서 여자가 운전하는 차가 빵빵

대는 걸 보고 길 한쪽으로 비키면서 ‘여자가 운전하는 차에 치이면

재수없어’라고 말할 정도였어요. 그리고 장손며느리인 친구가 딸

둘을 낳은 걸 보고 잡지에서 본 아들 낳는 비법을 가르쳐 주던 때

도 있었죠. 불평등으로 억압을 받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문화에 길

들여져 왔었던 거예요. 그래서 남성중심적인 사고를 하는 여성들을

보더라도 언제든지 내가 경험한 것처럼 변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

요.”

그는 고대하는 호주제도의 폐지가 성사된다 해도, 앞으로 갈 길은

멀다고 말한다.

“일본은 호주제가 폐지되고 남녀 성씨를 선택할 수 있게 돼 있어도

좀처럼 문화가 안 바뀌는 걸 보면, 제도도 바뀌지 않고 있는 우리나

라는 오죽할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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