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5월 작고한 소설가 박경리 선생(당시 그는 장례위원장을 맡아 하루도 빠짐없이 장례식장으로 발길을 향했다고 한다)에 이어 또 한 사람의 우리 문학계 거목의 쓰러짐은 한 시대와의 작별이기도 하다.
40세 전업주부로 늦깎이 등단40년간 열정적인 창작활동
전업주부던 1970년 40세의 나이로 소설 ‘나목’을 들고 늦깎이로 등단한 작가는 이후 40년간 참았던 갈증을 풀어내듯이 지칠 줄 모르는 열정과 지구력으로 한결같은 창작 생활을 유지했다. 일흔셋의 나이에 수십 년 전 아련한 기억에 기초한 사랑 이야기(‘그 남자네 집’)를 마술처럼 풀어놓았고, 등단 40주년을 맞은 지난해까지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산문집을 펴내 감탄을 자아냈다. 이처럼 그가 문학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평생 그 울타리 안에서 살게 만든 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전쟁’이다. 대학에 입학했으나 전쟁 발발로 한 학기도 채 채우지 못한 채 학업의 끈을 놓아야 했고, 친오빠는 의용군에 끌려갔다 총상을 입고 결국 죽음을 맞이했다. 지난해 한 문예지와의 대담에서 “6·25가 없었어도 내가 글을 썼을까, 6·25가 안 났더라면 선생님이 됐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며 “이걸 잊지 말고 기억해야겠다. 언젠가는 이걸 쓰리라 생각했다”고 술회했다.
이후 또 한 번의 격랑이 그를 덮친다. 바로 1988년 5월과 8월 세 달 간격을 두고 남편과 스물여섯 살 창창한 나이의 외아들을 잇달아 잃은 것. 이후 부산 수녀원에 칩거, 이해인 수녀와 교우하며 겨우 삶으로 다시 귀환했다. 당시의 참담한 심정은 한동안의 세월이 흐른 후 “신이 생사를 관장하는 방법에 도저히 동의할 수가 없고, 특히 그 종잡을 수 없음과 순서 없음에 대해선 아무리 분노하고 비웃어도 성이 차지 않았다”(‘한 말씀만 하소서’ 2004년)로 걸러내 표출됐다.
지난 25일, 그는 23년 전 남편과 외아들이 나란히 묻힌 경기도 용인천주교 공원묘지에 안장됐다. 지난해 한 산문집에서 그가 소망했듯이 “어떤 무덤도 잘난 척 하거나 돋보이려고 허황된 장식을 하지 않는 평등한 공동묘지”에서 영원한 안식처를 찾은 것이다. 결국 유작이 된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서문에서 그는 말한다. “또 책을 낼 수 있게 되어 기쁘다” “아직도 글을 쓸 수 있는 기력이 있어서 행복하다”라고. 지인인 이해인 수녀의 말처럼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새로운 것, 배움에 대한 열정”이 넘쳤던 삶이었다.
오빠, 남편, 외아들의 죽음, 참담한 고통이 문학으로 정화
주요 작품으론 장편소설로 ‘휘청거리는 오후’ ‘서 있는 여자’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미망’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아주 오래된 농담’ ‘그 남자네 집’ 등이 있고, 소설집으론 ‘엄마의 말뚝’ ‘꽃을 찾아서’ ‘저문 날의 삽화’ ‘한 말씀만 하소서’ ‘너무도 쓸쓸한 당신’ ‘친절한 복희씨’ 등이 있다. 이와 함께 어른도 함께 읽을 수 있는 동화집 ‘나 어릴 적에’ ‘이 세상에 태어나길 참 잘했다’ ‘부숭이의 땅힘’ ‘보시니 참 좋았다’ 등이 있다. 수필집으로는 ‘세 가지 소원’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여자와 남자가 있는 풍경’ ‘살아 있는 날의 소망’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 ‘어른노릇 사람노릇’ 등이 있다. 특히 1989년 여성신문 창간 이듬해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를 신문에 연재, 당시로선 파격적으로 싱글 여성의 양육권 투쟁과 이를 통한 자아 찾기를 심도 있게 다뤄 많은 관심을 모았다.
한국문학작가상(1980), 이상문학상(1981), 대한민국문학상(1990), 현대문학상(1993), 동인문학상(1994), 대산문학상(1997), 만해문학상(1999) 등을 수상했으며, 2004년 예술원 회원으로 선임됐다. 생전 보관문화훈장에 이어 사후 이명박 대통령에 의해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됐다.
1931년 경기도 개풍에서 태어나 숙명여고를 졸업한 후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했으나 한국전쟁 발발로 학업을 접어야 했다. 이후 2006년 5월 서울대 대학본부에서 당시 정운찬 총장으로부터 국내 문학인으로는 처음으로 명예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93년 3월 유니세프를 통해 소말리아 난민촌을 방문한 것을 계기로 같은 해 5월 배우 안성기씨와 함께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최초의 친선대사가 돼 지난해 9월까지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