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호뿐인 정책보다 아이를 함께 키울 수 있는 시스템 확산돼야
죄책감·미안함보다는 자신의 결정에 믿음을 갖고 자신을 사랑해야
버거운 현실 속에서도 일과 생활의 균형을 찾고 열심히 살아가는 워킹맘 이은경(46·도서출판 세경 대표), 이승언(38·한살림 서울생협 기획관리부 부서장), 김기리(37·성공회 사제)씨 등 3명이 8일 저녁 서울 정동 여성신문사 편집국에 모였다.
이들은 일과 육아라는 두 전선을 오가며 쌓인 애환을 속 시원히 털어놨다.
육아는 절대적으로 ‘친정 의존’
-결혼해서 애 낳고 일해 보니 세상의 모든 워킹맘에 대한 존경심이 샘솟아요. 저도 워킹맘이지만 정말 일하면서 애 키우는 여자들 대단하죠.
-애 낳고 한 3주는 정말 우울했어요. 전에는 모든 시간이 온전히 내 것이었는데 애 낳고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는 거예요. 다른 일을 하다가도 애가 울면 바로 뛰어가야 되고. 그게 산후우울증이었나 봐요. 육아휴직 끝내고 복직해서도 저녁 6시만 되면 불안해진다니까요.
-일주일에 3일은 친정에서 살아요. 절대적 친정 의존형이죠. 친정 도움이 없거나 육아와 살림을 전담해주는 사람이 없으면 온전히 일에 집중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맞아요. 여자가 일하려면 친정엄마나 베이비시터라는 또 다른 여자의 희생이 필수라잖아요.
-친정에 빌붙어 살다 보니 관계가 좋을 땐 좋지만 친정 엄마와 조금만 트러블이 생겨도 참 어렵죠. 그래서 엄마도 저도 맘에 들지 않는 일이 있어도 조금씩 참고 그러는 것 같아요.
-친정 부모님과 한 집에 사는데 딱 어느 순간엔 경제적인 것에서 갈등이 생기더라고요.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생활비를 적게 드려서 이렇게 말씀하시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애 봐주시는 건 정말 감사하지만 가끔 친정 엄마랑 육아 스타일이 달라서 피곤할 때도 많죠. 내 애를 내 맘대로 키우지 못한다고 할까. 그래서 아이가 버릇이 없어지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하죠.
-평일 저녁 약속 잡는 것도 진짜 눈치 보여요. 오랜만에 잡힌 약속이라도 사양하기 일쑤예요.
-저도 결혼 전엔 나름 화려한 밤생활(?)을 즐겼어요.(웃음) 하지만 지금은 다 청산했죠. 엄마가 하루 종일 애 보느라 힘든 거 아는데 저녁 약속 잡기가 참 눈치 보이더라고요. 지금은 온라인과 문자로만 인맥 관리를 하고 있어요.
-맞아요. 아예 1박2일 워크숍 같은 게 훨씬 마음 편하죠. 공식적으로 안 들어갈 수 있으니 술도 맘 편하게 마실 수 있으니까요. 오늘 좌담회도 1박2일로 잡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어요.(웃음)
포기할 수 없는 사회적 성취
-둘째 낳고나서 베이비시터가 여러 번 갑자기 펑크를 냈어요. 힘들게 친정에 맡기고 일하러 가면서 ‘내가 무슨 기생충인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예 쉬는 게 두루두루 좋을 것 같아 집에 들어앉았지만 좀 지나니까 오히려 우울증이 오더라고요. 9년간 애 키우고 여행도 다니고 해봤지만 그 공허함은 채워지지 않아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됐죠.
-유전자가 다른 거죠. 우린 일하는 유전자가 발달했다고나 할까. 저는 살림도 육아도 잘한다고 생각하는데 일을 할 때는 더 행복하더라고요. 결국 육아와 살림에서 힘을 빼고 일하는 데 집중하기로 했어요. 잘 하는 것보다 행복한 일을 선택한 거죠.
-경제적인 이유도 있죠. 하지만 입주 도우미 쓰고 어린이집에 아이 보내고 출퇴근용 옷도 좀 사 입고, 화장품도 사다 보면 집에서 애만 키울 때보다 돈이 더 들어 이게 버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일을 하다보면 승진도 하게 되고 점점 조직에서 책임 있는 위치에 있게 되는데 그럴 땐 워킹맘이라는 이유로 조직의 배려를 기대하긴 어려운 것 같아요. 조직 안에서 책임자 혹은 관리자 급에 올라서면 애 엄마라는 것과 성(性)은 버려야 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직장에서 여성은 제가 처음이라 육아휴직 같은 제도가 전무했어요. 제가 들어오고 임신하면서 남자 동료들이 먼저 나서서 제도도 만들고 배려해주는 식이었죠. 결국 후배들은 편하게 되었죠.
-제가 회사 사장 입장에서 보면 육아 때문에 집에서 쉬고 있는 사람한테 일을 맡겨보면 일반 프리랜서보다 더 열정적이고 책임감 있게 일하는 걸 느낄 수 있어요. 이런 고학력 여성들이 집에만 있다는 건 국가적으로도 낭비죠.
‘돕는’ 남편 늘었지만…
-미국에서 목회를 하는 목사 친구가 있는데 지금 제일 필요한 게 ‘사모님’이라고 하더라고요.(웃음) 주위 목사들은 아내가 있어서 집안일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지만 여자인 친구는 목회 일부터 집안일까지 도맡아 해야 하니 힘에 부친다고요.
-남편이 워커홀릭(workaholic) 수준이라 30대 때는 거의 과부로 살았어요. 남편은 낮엔 직장, 밤에는 세컨드 잡(second job)에 책까지 쓰니, 얼굴 볼 시간조차 없었어요. 딸이 아빠에게 하는 인사가 ‘안녕하세요’였을 정도였으니까요. 덕분에 얼굴 볼 일이 없어 싸울 일도 없더라고요.(웃음)
-제 남편은 제가 복직할 때 일을 그만두고 육아를 전담하고 있어요. 남편이 애 키우면서 여자들은 대단하다는 말을 많이 해요.
-정말 부럽네요. 제 남편은 화재경보가 울려도 잠에서 깨지 않는 사람이에요. 애가 새벽에 배가 고파 울어도 단 한 번도 우유를 안 주더라고요.
-제 몸이 힘드니까 부부 잠자리도 피하게 되더라고요. 남편이 아는지 모르는지, 제가 거절해도 계속 요구해서 힘들어요. 친밀감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마음은 알겠는데 몸이 안 따라주는 걸 어쩌라고요.
-정말 주변 얘기 들어보면 맞벌이 부부 중에는 섹스리스(sexless)도 많다더라고요.
-저도 애 낳고 6개월까지는 새벽 수유 때문에 피곤해서 관계를 피하게 되더라고요. 요즘도 남편에게 관계보다는 가만히 안아만 달라고 말해요. 사실 이런 일이 몇 번 반복되니까 좀 미안한 마음도 생기긴 해요.
-그리고 여자들은 애를 낳고 나면 애정의 중심이 남편에서 아이로 바뀌잖아요. 남자들은 그걸 잘 모르더라고요. (웃음)
-육아가 너무 힘드니 둘째 낳을 엄두가 안 나요.
-전 사실 마음만 먹었는데 생겼어요. 거의 성모 마리아 수준으로 둘째가 생기더라고요.(웃음)
-주변에서도 둘째는 사고(?) 치지 않는 한 맨 정신에는 못 낳는다고들 해요.
-요즘 TV에서 보건복지부의 ‘마더하세요’라는 캠페인 광고가 나오는데 참 싫더라고요. ‘마음을 더하세요’와 ‘엄마되세요’를 합친 말이라는데 광고에 나오는 회사 동료와 상사가 하필이면 모두 남자더라고요. 게다가 다들 엄마가 될 주인공을 위해 희생한다는 게 주 내용인데 참 씁쓸하고 ‘오버한다’고 느껴졌어요.
-서울시도 여행프로젝트라는 캠페인을 하고 있던데 사실 이런 저출산 구호나 캠페인은 그때뿐이지, 실질적인 효과는 없거든요.
-먼저 경력단절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야 출산휴가나 육아휴직도 마음 놓고 쓰죠. 제가 진짜 쉬다가 나와 보니 정말 아무도 안 써주더라고요. 기업에서 탄력근무나 시간제근무 같은 다양한 근무 형태를 시행하고 눈치 보지 않고 그런 제도를 쓸 수 있도록 해야 해요.
-그런데 기업 혼자 책임지도록 하면 기업이 봉사하려고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어떤 회사가 그런 제도를 만들겠어요. 정부가 잘하는 기업에는 세금 혜택으로 지원해주는 정책도 필요해요.
-남자도 6시 ‘땡’ 하면 집에 가고, 야근하는 게 대단하다고 여기는 문화도 바뀌어야 해요.
-저 사람 때문에 내가 손해 본다고 생각하는 분위기도 사라져야 해요.
-남의 아이가 잘 돼야 내 아이도 잘 크잖아요. 그게 바로 공동육아의 깊은 의미인데, ‘육아도 맞들면 낫다’고 하잖아요. 직장문화도 바뀌고 아이를 함께 키울 수 있는 시스템이 확대되면 저출산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요.
“엄마처럼 살고 싶다”에 ‘으쓱’
-항상 아이한테는 돈보단 엄마와 함께하는 시간이 더 선물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미안한 마음이 있죠.
-저희 친정 엄마는 이화여대 정외과까지 졸업하시고는 일을 그만두셔서 늘 안타까웠어요. 그것 때문인지 제가 더 악바리처럼 살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최근에 제 딸이 “크면 엄마처럼 살고 싶다”고 말하더라고요. 제가 이제껏 헛산 게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제가 딸의 ‘롤 모델’이 됐다는 게 기분 좋더라고요. 남편도 아내가 집에서 자신만 바라보는 것보다 더 좋아하는 것 같아요.
-대한민국의 치열한 교육열은 고학력 주부들이 집에만 있어서 그런 것 같아요. 일자리를 쪼개든지, 다양한 근무 형태를 만들든지, 여성 고급인력이 사회로 나올 수 있어야 해요. 그러면 감정적인 낭비에 가까운 교육열과 아이에 대한 지나친 집착도 사라지지 않을까요.
-출산과 양육을 하면서 사랑과 감사라는 단어를 온전히 알게 됐고 삶에 대한 책임감이 이전과 전혀 달라졌어요. 출산의 경험이 일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느끼고요.
-죄책감과 부담감을 갖고 있을 수밖에 없는 워킹맘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자신의 결정에 믿음을 갖고 자신을 사랑하는 일 같아요. 또 동네에서 함께 아이를 키우는 마을 육아와 여성이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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