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할머니 할아버지와 다정하게 전화 좀 받으시죠”라고 딸 예린이가 지적할 때마다 “할아버지가 늦게 다니지 마라. 할머니가 밥 좀 꼭 먹고 다녀라. 이제 내 나이가 몇 살인데 좀 심하신 거지”라고 변명 아닌 변명을 하던 나였다. 그저 물가에 내놓은 아이 보듯 하시는 부모님에 대해 쌓인 불만을 토로하던 나의 태도는 영화 ‘소중한 사람’을 떠올리며 요즘 생각이 많아졌다.

‘소중한 사람’은 제11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2009)의 ‘천개의 나이 듦’ 섹션에서 ‘오리우메’라는 제목으로 상영된 영화다. 한국에 너무 늦게 도착한 일본의 마쓰이 히사코 감독이 연출한 이 영화는 2002년 일본에서 ‘오리우메(折り梅·꺾어진 매화는 다시 피어난다)’란 제목으로 개봉된 후 지역 상영회 등을 통해 200만 명 이상이 관람했을 정도로 꾸준히 관심을 끌어왔다.

나이 50세가 넘어 영화감독이 됐으며 이 영화가 상영된 1370곳 중 400여 곳을 직접 찾아 다녔을 정도로 열정의 소유자인 마쓰이 히사코 감독, 역시 영화를 만들던 당시 66세였다는 치매 걸린 할머니 마사코 역으로 출연한 요시유키 가즈코, 이렇게 감독, 배우 모두 이 영화의 주체로서 ‘나이 듦’이라는 주제에 마음을 다해 만든 이 영화는 이번 한국 개봉 때 한국어 더빙을 해 실제 연로하신 관객들이 볼 수 있게 함으로써 관객들에 대한 서비스도 완전하게 갖추었다.

여러 자식이 있지만 셋째 아들 내외의 제안으로 그들 가족과 함께 살기 시작한 마사코와 착실한 아들, 싹싹한 며느리, 할머니를 곧잘 따르는 손녀 손자가 등장하는 영화의 시작은 자칫 진부하고 평범하다. 하지만 즐겁던 생활도 잠시, 이유 없이 불같이 화를 내거나 건망증이 나날이 심해지는 마사코와 함께 살고 있는 가족이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긴장이 강화될수록 한없이 불편한 영화가 되기 시작한다. 그 ‘불편함’은 아마도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누구나 한 번 이상 느껴봤을 법한, 하지만 누구에게도 속 시원하게 말할 수 없는 갈등과 꼭 닮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자신의 어머니면서도 마사코의 아들인 도모에의 남편이 보이는 태도라든지, 마사코와 도모에가 공감에 도달하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전통과 현대의 고부 관계의 줄타기를 하고 있는 이 영화의 영리한 전략에 미소와 실소를 번갈아 짓게 된다. 도모에가 시어머니의 간호에 힘들어하면서도 자신의 일을 그만두지 않는다든지 일터와 주변 지인들은 물론 다양한 노인 복지시설이나 도우미의 도움을 받고 가족 구성원들과 일을 나누는 과정에서 그 일을 혼자만이 아닌 함께 하는 일로 만들면서 치매에 대한 생각을 바꿔가는 것 역시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주는 교훈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가장 빛나는 지점은 시어머니의 완력으로 여지없이 무너지는 힘겨운 과정 후 마침내 시어머니를 시설에 보내려고 시도하는 과정에서 도모에가 도리나 책임이 아닌 사랑으로, 마사코라는 여성을 온전하게 알게 되는 과정일 것이다. 너와 내가 쉼 없이 나이를 먹듯이 또 우리 모두 언젠가는 어떤 이의 아이였고 누군가의 소중한 사람이었으며 그 과정에서 감추어진 아픔을 견디며 살아온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이다.

꺾어진 매화가 여전히 아름답게 꽃을 피우듯이 나이 듦이 끝이 아니며 그 존재 안에 꿈틀대고 있는 그 무엇을 내장하고 있는 한 우리네 삶은 여전히 아름답고 소중하다는 것, 자신의 삶에 대한 배려가 만든 자긍심과 그런 나를 응원해주는 소중한 사람이 있는 한, 우리 삶은 살아갈 이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는 영화다. 삶을 시종일관 반짝반짝 빛날 수 있게 하는, 자신에게 진정 ‘소중한 사람’이 누구인지 마음 깊이 새겨봐야 할 때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