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용 불안과 생활고로 단기 아르바이트 전전
최저임금 못 미치는 돈도 떼이기 일쑤
연속 노동시간 48시간…사고 위험 크지만 사회보장제도는 취약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은 영화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훈련인센티브 도입을 위해 공청회, 시위, 성명서 배포 등 각고의 노력을 해왔다. 사진은 국회의사당에서 벌인 피켓시위 모습.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은 영화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훈련인센티브 도입을 위해 공청회, 시위, 성명서 배포 등 각고의 노력을 해왔다. 사진은 국회의사당에서 벌인 피켓시위 모습.
서울의 예술전문대 영상연출과 출신의 김모(36·서울 노원구)씨는 영화판에서 조명 전문가로 일한 지 10년을 넘긴 베테랑이다. 그러나 1년 중 영화 2편 정도를 만드는 4~5달을 제외하면 대리운전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한다. 그는 “영화학과 다니면서도 학자금 때문에 빚을 졌는데, 일하면서 갚기는커녕 빚이 늘어간다. 돈 없는 사람은 영화하지 말라는 게 이 바닥 정서”라며 “헝그리 정신? 예술가는 원래 배고픈 직업이라고? 우리는 굶으면 안 죽나?”라고 반문한다.

월평균 임금 73만원, 연평균 실업 기간 6.5개월, 촬영기간 중 야간근무 시간(밤 10시~다음날 새벽6시) 평균 4.9시간, 평균 66% 정기 휴일 없음, 평균 45% 임금 체불 경험(영화스태프 근로환경 실태조사, 국가인권위 2011). 영화노동자들의 복지 수준은 이렇게 수치상으로 드러나는 면모만으로도 가히 충격적이다.

한국의 영화산업은 지난 10여 년간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눈부신 발전을 이루며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유망한 경제 영역 가운데 하나로 부상했다. 그만큼 영화산업에 종사하는 인력도 늘어났지만 그 성장의 과실은 영화산업 노동자들에게 고루 확산되지 않고 있다.

전문가들이 영화산업 노동자 복지의 가장 큰 걸림돌로 꼽는 것은 프로젝트형 노동시장과 도급계약 형태의 계약 관행이다. 영화 스태프 계약은 대체로 투자가 확정된 후 본 촬영에 들어가기 전 60~45일간의 사전 작업이 시작되는 시점에 체결하고, 일을 하면 그 결과를 바탕으로 다음 계약의 단가를 조정하는 전형적인 프리랜서 계약 방식인 도급계약이 대부분이다. 더구나 촬영부, 조명부, 미술부 등 주요 부서 대부분에서는 아직도 팀장과 계약하는 통계약도 상당히 남아 있다.

박지영 여성영화인모임 사무처장은 “표준근로계약서에는 회차, 기간, 일일 노동 시간, 임금지급 방식까지 정하게 돼 있지만,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근로계약서에는 ‘촬영 종료 기간까지 얼마를 주겠다’는 식의 아주 심플한 내용만 담겨 있다”며 “사정이 이렇다 보니 영화노동자들은 임금 체불 등의 문제가 발생해도 보호받기가 어렵다. 정기적인 임금을 받지 못한다는 이유로 고용노동부로부터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해 지방 관할 고용노동지청에 진정을 접수해도 반려되는 사례가 많다”고 전했다.

그러나 더욱 큰 문제는 생활고에 시달리는 영화노동자들 스스로가 이런 상황을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 여기고 묵인하고 있다는 것이다. 생계형 빚을 지고 있는 영화노동자 중에는 고용계약 형태보다는 현금 거래 형태의 기존 계약 관행을 불가피하게 유지하고자 하는 사람이 많다.

영화의 기획팀에서 스태프로 일하고 있는 김모(28·서울 서대문구)씨는 계약금만 받고 일하다가 잔금 지불을 미루는 제작사 때문에 “계약금을 안 받으면 일을 안 하니까 그건 어떻게 해서든 주지만, 잔금은 이런저런 핑계로 미루는 경우가 많다. 투자 다 됐다, 걱정 마라 꼬드기고 나중에는 미안하다는 말뿐”이라며 “투자가 다 되고나서 캐스팅을 하고 제작을 해야 하는데, 무리하게 욕심을 내서 그런 것 같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프리프러덕션(사전제작) 단계에서 갑자기 엎어진 작품이 있었는데, 두 달에 300만원 준다는 내용의 계약을 했지만 100만원을 받았다. 사실 그것도 감지덕지다. 다음 작품에서 불이익을 당할까봐 눈치 보여서 그나마도 말을 못 꺼내는 경우도 많다”고 토로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대부분의 영화노동자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단기 아르바이트를 전전할 수밖에 없다. 조명기사 김모씨는 “작품을 시작하면 거기에 완전히 몰입해야 하니까 동시에 다른 작품을 할 수도 없고, 단기 아르바이트를 계속 새로 구해야 하니 불안불안하다. 아르바이트도 그나마 좋은 자리는 장기간 일할 수 있는 사람을 원하고, 나이도 들어가니 일자리 구하기가 점점 더 힘들다”고 밝혔다.

연속 노동시간이 24시간에서 심지어는 48시간을 넘는 일이 허다한 점도 문제다. 부족한 제작비를 보완하기 위해 여러 회에 걸쳐 찍을 분량을 한 회에 몰아넣는 ‘회차 줄이기’와 같은 관행은 영화노동자들의 노동환경을 더욱 열악하게 만든다. 한 회 촬영에 소요되는 비용은 평균 1억원인데 회당 12시간 일을 하든 20시간을 일하든 비용에는 큰 차이가 없어 스태프들에게 강한 시간 압박을 넣게 되는 것이다. 폭발물이나 중장비 사용이 많아 가뜩이나 돌발 상황도 자주 발생하기 때문에 ‘빨리빨리’를 강조하다 보면 사고의 위험도 잦다.

영화미술감독 장모(33·서울 강남구)씨는 “한번은 서울에서 밤샘 촬영을 하고 밤 12시가 넘어 끝났는데 바로 목포에 내려가 새벽 6시 배를 타야 할 일이  있었다. 방송은 운전하는 분들이 따로 있다는데 우리는 그렇지 않다. 동료 스태프가 거의 밤을 새우고 운전하는데, 비몽사몽 졸면서 가더라”고 회상하며 “그러니 사고가 나지 않을 수 있겠나”라고 반문했다.

이 분야의 산재보험 등 사회보장제도는 여전히 매우 취약하다. 통계약을 하면 노동자가 3.3%의 세액을 부담하지만, 사회보험에 가입하면 그보다 보험료가 커지기 때문에 영화노동자들 스스로도 적극적으로 요구하지 않는다. 더구나 임금이나 복지정책을 조율할 수 있는 노조가 설립된 것도 극히 최근의 일이다. 한국 영화의 역사는 100년이지만,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이 설립된 것은 2005년이고, 임금 단체협상도 2007년에야 최초로 이뤄졌을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7일 영화진흥위원회가 2012 사업계획의 일환으로 영화인의 복지 향상을 위한 교육훈련 인센티브 지원제도를 도입하겠다고 발표한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한국형 ‘앵테르미탕’(Intermitt-ent·프랑스의 문화예술 분야 비정규직 실업부조금제)이라 불리는 인센티브제는 작품 제작에 참여하지 않는 기간에 노사가 공동으로 제공하는 전문 교육을 받으면서 실업급여 형태의 교육훈련 수당을 받는 제도다.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은 지난 10여 년간 이 제도의 도입을 강력히 주장해 왔다.

최진욱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 위원장은 “원래 계획인 30억원 예산에서 10억원 규모로 축소된 데다 500여 명의 영화인들만을 대상으로 한 제한된 정책이긴 하지만 당장 다급한 처지에 있는 영화노동자들의 숨통을 트일수는 있을 것”이라며 “사회연대계약의 물꼬를 텄으니 앞으로는 이 사업을 확장하고 지속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 정책에 공감하는 대기업들이 동참을 약속해 오고 있다. 실무진 단계에서의 합의는 이미 마친 상태”라고 귀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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