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은 사내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양정자 시인은 여성신문 1991년 신년호 축시에서 이렇게 적었다. ‘역사와 현실’은 정치를 제외하고 논할 수 없다. 가정 살림을 꾸리는 생활정치가 아닌 대한민국의 살림을 일으키는 현실정치 말이다.
정치의 꽃은 선거다. 1991년은 국가적으로 두 번의 큰 선거를 치른 해다. 3월 26일 실시된 기초의회 의원 선거와 6월 20일 실시된 광역의회 의원 선거가 그것이다. 노태우 대통령의 공약 중 하나였던 지방자치제를 실현하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당시 각계각층에서 활동하던 여성들은 입후보할 뜻을 내비쳤다. 그들은 구태의연한 금권선거가 아닌 ‘알뜰한 선거’를 하겠다며 출사표를 던졌다. 남성들에 비해 약한 정치 조직력 때문에 정당의 공천을 받는 것조차 쉽지 않았지만 여성들은 ‘집 안 정치’를 벗어나 ‘집 밖 정치’를 하기 위해 용감히 나섰다. 여성의 정치 참여야말로 여성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마주한 현실은 ‘암흑’ 그 자체였다. 소위 진보정치를 하고 있다는 민주당 의원들도 1990년 가정 내 여성의 법적 지위와 권한을 대폭 허용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가족법이 개정될 당시 “남자 권리 다 빼앗겼는데 무슨 경사냐”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1991.12.20, 제154호 보도)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집 밖으로 나오지 말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날릴 때, 여성계는 여성들의 정치참여를 위해 힘을 모았다. ‘정치참여를 위한 범여성모임’을 조직한 것.(1991.2.15, 제111호 보도) 모임에는 신낙균 여성유권자연맹 회장, 이정자 소비자보호단체협의회 총무, 한명숙 여성민우회장 등 여성계 인사 100여 명이 참여했다. 이들은 “양성평등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양성평등한 국회를 만들어야 한다”며 ‘지방의회 의원선거법 개정을 위한 청원서’를 국회에 제출해 법 개정을 촉구했다.(1991.2.15, 제111호 보도)
지면을 통해 여성운동을 하던 여성신문 역시 기성 언론에서 다뤄지지 않던 여성 후보들을 적극 소개했다. 그들이 정치를 하게 된 계기, 정치철학, 정책을 인터뷰해 매호 지면에 실었다. 인물은 다양했다. 무대에서 노래하던 성악가부터 병원에서 환자를 치료하던 의사, 유치원 교사, 여성운동가 등. 국내뿐 아니라 해외 여성들의 정치참여에 대해서도 보도했다. 류숙렬 뉴욕특파원은 미국 여성정치의 현주소와 우리가 나아갈 길을 되짚으며 선진 사례에 대해 집중 취재했다.(1991.6.7, 제127호 등 보도)
또 남성 정치인들을 만나 ‘여성정책’에 대한 비전을 듣기도 했다. 여성신문은 신년호와 송년호에 정대철 당시 평민당 총재특별보좌관(현 민주당 상임고문)의 인터뷰(1991.1.4, 제106호 보도), 지금은 고인이 된 김대중 당시 민주당 공동대표(전 대통령)와의 인터뷰 기사(1991.12.20, 제154호 보도)를 실으며 진보 정치인들의 ‘여성인권 감수성’이 얼마나 되는지 진단했다. 김대중 민주당 대표는 “여성들이 가진 표로 정치를 움직일 수 있다”며 “여성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여성들이 여성 후보에게 투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력이 투표 결과로 입증되진 않았다. 남성 중심 정치의 뿌리는 깊었다. 기초의원 선거에서는 총 124명이 출마해 40명이 당선됐다. 32.3%의 당선율을 보이며 선방하는가 싶었다. (1991.4.12, 제119호 보도) 참패를 경험한 것은 광역의회 의원 선거에서였다. 공천에서부터 배제됐다. 집권당인 민자당에서는 822명의 후보 중 11명을, 신민당은 564명 중 17명을, 민주당은 426명 중 5명을 공천하는 데 머물렀다. 결국 여성들은 광역의회 전체 866석 중 총 8석을 획득하며 참패했다. 여성계는 선거 패인에 대해 “여성들의 정치의식이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 “자금력과 조직력은 부족하지만 대표성을 띠고 있는 여성 후보에 대한 각 정당의 공천 할당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1991.7.5, 제131호 보도)
선거 참패는 여성들을 분노케 했고 1992년 총선을 준비하는 기폭제가 됐다. 남성 중심 의회의 벽을 깨기 위해선 더 큰 힘이 필요함을 절감했다. 곧바로 정치 실전 능력을 교육받을 수 있는 ‘한국여성정치연맹’이 생겼고(1991.5.31, 제126호 보도) 총선에 입후보하겠다고 선언하는 여성들이 속속 등장했다. 여성신문은 기초의원 선거 때와 마찬가지로 광역의회에 도전하는 입후보자들의 인터뷰를 실으며 그들의 선거운동에 힘이 돼줬다.
‘역사와 현실은 사내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시구는 오늘날에도 현실이 되지는 못했다. 한쪽에선 ‘남녀동수’ 운동을 펼치며 여성의 대표성을 남성과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리자는 주장까지 나오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국회의원, 여성 공직자 비율은 여전히 남성에 현저하게 뒤지고 있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대한민국에 대의민주주의가 살아 있는 한 선거는 계속된다. 가까이는 올해 지방선거가 우리 여성들을 기다리고 있다. 다시금 여성들의 ‘집 밖 정치’가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