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Hot) 열정으로 가득 찼던 쿨(Cool)했던 선수들이 자신만(Yours)의 기록을 썼다. ‘뜨겁게, 차갑게, 그대의 것(Hot, Cool, Yours)’이란 슬로건 내걸고 지난 2월 8일 개막한 소치 동계올림픽이 17일간의 열정을 마치고 24일 폐막식을 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평창에 바통을 넘겨줬다. 대한민국 대표팀은 이번 올림픽에서 금메달 3개, 은메달 3개, 동메달 2개로 종합 13위를 기록했다. 당초 목표했던 금메달 4개와 동계올림픽 3회 연속 10위권 진입에는 실패했지만, 그 어느 때보다 여성 스포츠 선수들의 활약상이 돋보인 대회였다. 감동과 논란의 소치 동계올림픽을 돌아봤다.
‘안현수 사태'가 던진 한국 체육계의 씁쓸한 현주소
안현수(29)가 완벽하게 부활했다. 정확히 말하면 러시아의 빅토르 안이다. 토리노 동계올림픽에서 한국에 3개의 금메달을 안겨줬던 안현수가 소치에서는 ‘빅토르 안’이란 이름으로 러시아에 금메달 3개와 동메달 1개를 선사했다. 안현수는 역대 쇼트트랙 선수 중 가장 많은 금메달을 따낸 선수가 됐다. 파벌 싸움 논란과 소속팀 해체 등으로 갈 곳을 잃은 안현수는 2011년 전격적으로 러시아로 귀화했다. 귀화 이후 러시아 선수 ‘빅토르 안’에 대한 동정여론이 일었다. 국내 여론도 거들었다. 비난의 화살은 파벌 문제와 비리로 얼룩진 대한빙상경기연맹으로 향했다. 안현수가 러시아의 영웅으로 거듭나자, 급기야 박근혜 대통령까지 나섰다. 박 대통령은 동계올림픽 기간 중이던 2월 13일 “러시아에 귀화한 안현수 선수는 쇼트트랙 선수로서 최고의 실력을 갖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자신의 꿈을 펼치지 못하고 다른 나라에서 선수 활동을 하고 있다”며 “안 선수의 문제가 파벌주의, 줄 세우기, 심판 부정 등 체육계 저변에 깔려 있는 부조리와 구조적 난맥상에 의한 것은 아닌지 되돌아봐야 한다”고 체육계에 따끔하게 지적했다. 박 대통령 발언 이후 문화체육관광부는 빅토르 안과 관련된 일련의 사태를 겪고 있는 빙상연맹에 대한 전면감사에 나설 뜻을 표했다. ‘안현수 사태’는 한국 체육계의 씁쓸한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피겨 여왕’의 의연한 작별… “잘 자라줘서 고맙다”
김연아(24)의 고별무대는 완벽했다. 17년 선수생활의 마지막 현역 무대를 장식한 소치올림픽에서 클린 연기를 펼치며 총점 219.11점(쇼트 74.92점, 프리 144.19점)을 받았다. 밴쿠버에 비해 점수가 다소 박했지만, 김연아의 올림픽 2연패 달성은 피겨 전문가는 물론 내외신에서도 이견이 없었다. 하지만 금메달은 러시아의 아델리나 소트니코바에게 돌아갔다. 편파 판정 논란이 거세게 일었다. 서방 언론은 연일 분석 기사를 쏟아내며 판정에 의문을 제기했다. 심판 배정도 논란거리였다. 러시아빙상연맹 회장 부인이 심판에 포함된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국내 언론은 감정적 보도를 쏟아냈고, 여론은 들끓었다. 누리꾼들은 다소 과한 ‘전쟁’을 벌였다. 그럼에도 정작 김연아는 의연했다. “금메달은 더 절실한 사람에게 간 것”이라며 여왕다운 품격을 보여줬다. 김연아는 23일 갈라 쇼를 마친 후에도 “나는 정말 괜찮다. 계속 말씀드렸듯이 판정에 대해 되새겨본 적이 없다. 나보다 주변에서 더 속상해하는 것 같다”며 “결과가 어찌 됐든 경기가 잘 끝났다는 것이 만족스럽다. 항의한다고 결과가 바뀔 것 같지 않다”고 성숙한 태도로 일관했다.
김연아는 전설이 됐다. 전설은 현재 진행형이다. 그는 앞으로 글로벌 무대에서 한국 여성의 품격을 대변해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모습을 지켜보는 국민들은 엄마, 아빠의 미소를 머금고 말한다 “연아야, 잘 자라줘서 고맙다.”
당당한 아름다움을 즐길 줄 아는 ‘빙속여제’ 이상화 신드롬
‘빙속여제’는 격이 달랐다. 이상화(25)는 소치 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500m에서 합계 74초70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대표단 첫 메달이자 한국 빙속 사상 첫 2연패 달성의 쾌거였다.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잇따라 세계신기록을 갈아치웠던 그녀는 소치에서도 단거리 세계 최강자의 모습을 보여줬다. 이상화의 당당한 아름다운도 화제였다. 훈련으로 엉망이 된 발 사진과 대비되는 네일아트로 다듬어진 손톱이 이목을 끌기도 했다. 여느 20대 여성처럼 자신을 멋부리고 꾸미기를 좋아한다는 이상화는 여성성을 즐길 줄 알았다. 금메달 획득 이후 이상화 취재 경쟁이 불붙었고, 국내에는 ‘이상화 신드롬’이 일었다. 그가 착용한 운동복과 선글라스를 비롯해 취미로 알려진 레고와 네일아트 제품의 온라인 매출이 급신장했다. 김연아에 이어 ‘국민의 딸’로 우뚝 선 그녀의 광고 출연료는 5억원 수준이 될 것이란 게 업계의 전망이다.
설움 날린 여자 쇼트트랙… 2관왕 박승희, ‘에이스 본능’ 심석희
여자 쇼트트랙 대표팀의 행보는 한 편의 드라마였다. 밴쿠버에서 금메달을 1개도 따지 못한 여자 쇼트트랙은 절치부심하며 소치를 준비했다. 출발은 좋았다. 500m에서 박승희가 동메달을 차지했다. 이 종목에서 메달은 16년 만이다. 하지만 두 번이나 넘어진 박승희가 부상을 당했다. 3000m 계주는 한국 대표팀의 자매애가 만든 감동의 무대였다. 조해리(28·고양시청), 박승희(22·화성시청), 김아랑(19·전주제일고), 심석희(17·세화여고), 공상정(17·유봉여고)으로 구성된 여자 대표팀은 이번 대회 3000m 계주에서 8년 만에 금메달을 따냈다. 경기 막판 2바퀴를 남기고, 중국에 선두자리를 내준 한국은 ‘에이스’ 심석희가 믿을 수 없는 ‘막판 스퍼트’로 중국을 제치고 통쾌한 승리를 안겼다. 1000m에서는 부상의 우려를 딛고 박승희가 금메달을 목에 걸며 한국 선수 중 유일하게 2관왕에 올랐다. 2위를 차지한 중국의 판커신은 결승선 통과 직전 박승희의 옷을 잡아채는 반칙을 자행했지만 실격처리 되지는 않았다. ‘슈퍼에이스’로 거듭난 심석희는 박승희의 금메달을 도운 값진 동메달을 받았다. 평창은 심석희의 독무대가 예상된다. 남자 쇼트트랙 대표팀은 선전했지만, 12년 만에 노메달에 그쳤다.
비인기 종목 반짝 관심 아닌 지속적 응원을… 여자 컬링대표팀
여자 컬링대표팀은 올림픽 첫 출전으로 큰 화제를 모았다. 김은지(25), 김지선(27), 신미성(36), 엄민지(23), 이슬비(26·이상 경기도청)로 구성된 대표팀은 3승6패를 기록, 8위로 대회를 마쳤다. 비록 4강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강호들과 대등한 경기를 펼치며 전 국민에게 감동을 안겼다. 컬링 경기가 있는 날이면 주요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에는 어김없이 ‘컬링 규칙’ ‘컬링 순위’ ‘컬링 스톤’ 등의 검색어가 올라왔다. 소속팀 해체 위기에서 한국 첫 올림픽 진출을 일궈낸 드라마틱한 사연은 여러 매체들의 보도로 끊임없이 회자됐다. 2살 된 아이를 친정에 맡기고 훈련에 전념한 맏언니 신미성의 이야기도 잔잔한 감동을 안겼다. 경기도는 이들의 맹활약에 힘입어 도내 컬링 전용 경기장 건립 검토에 들어갔다. 현재 국내에 컬링경기장은 태릉선수촌 내 경기장과 경북 의성 전용 경기장 두 곳뿐이다.
폐막식에 울려퍼진 아리랑… 4년 뒤 평창에서 만나요
2월 24일 2014 소치 동계올림픽 폐막식이 끝나고, 다음 대회인 평창 동계올림픽을 소개하는 짤막한 영상이 소개됐다. 이어 가야금 연주와 아리랑 가락이 울려 퍼졌다. 세계적 성악가 조수미, 재즈가수 나윤선, 가수 이승철이 여러 가지 버전의 아리랑을 불렀다. 올림픽 깃발은 이석래 평창군수에게 전달됐다. 평창올림픽 조직위원회는 평창올림픽의 비전인 ‘새로운 지평(New Horizons)’을 전 세계와 함께 나누자고 제안하는 ‘동행(A Journey Together)’을 준비했다. 동계스포츠에서 소외된 나라의 어린이들을 위한 ‘드림 프로그램’ 참가자들이 함께 강강술래를 선보였고, 한국 선수단도 함께 어우러졌다. 4년 뒤 평창이 제시하는 ‘동행’의 메시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