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과학기술 분야 정책 로드맵 새롭게 짜야
위셋, 내년 가을 서울서 ‘젠더 서밋’ 개최
남성 중심적인 과학기술계에 성별(sex)과 젠더(gender)를 반영한 연구가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이른바 ‘젠더혁신(Gendered Innovations)’이다. 미국과 유럽 중심으로 연구되던 이 연구가 국내에 안착하면 연구자들의 성인지 관점이 강화되고, 잘못된 연구 결과로 인한 사회적 비용도 줄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가 모아지고 있다.
2010년 세계적 과학학술지 사이언스는 미국에서 부작용으로 판매가 금지된 약품 10개 중 8개가 특히 여성에게 위험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보고했다. 신약을 개발할 때 임상연구에서 대부분 수컷 동물만을 실험에 이용했기 때문이다. 실제 생식 등 일부 분야를 제외하고 실험 설계 시 여성의 생리주기는 거의 고려되지 않고 있다.
이런 사례는 과학기술 분야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렇듯 기초·응용연구 분야에서 성별과 젠더를 고려한 분석 방법을 통해 연구의 질을 높이는 과정을 ‘젠더혁신’이라 한다. 젠더혁신은 이미 미국과 유럽에서는 신약을 연구하고, 자동차 신모델을 개발하고, 생물학 교과서를 만들 때도 이용되고 있다. 미국 스탠퍼드대와 국립과학재단, 유럽연합(EU)이 진행한 ‘젠더혁신’ 프로젝트를 통해 의료, 환경 등 20여 개 분야에서 젠더 개념, 즉 여성이 빠짐으로써 무엇이 잘못됐는가를 밝혀낸 덕분이다. 이 프로젝트의 책임자인 론다 시빙거 스탠퍼드대학 교수는 젠더혁신의 방법을 ‘여성 숫자를 늘려라, 제도를 바로잡아라, 지식체계 자체를 바꿔라’로 요약했다.
젠더혁신을 국내 현실에 맞춰 도입하는 방안은 최근 여성과학기술계를 중심으로 심도 있게 논의되고 있다. 국내 젠더혁신 프로젝트의 첫 신호탄으로 17일 ‘과학과 엔지니어링에서의 젠더를 반영한 연구개발 혁신 방안 연구’ 보고서가 발간됐다. 한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가 서울대 산학협력단에 연구용역한 보고서는 시빙거 박사 등 해외 석학을 초빙한 워크숍과 전문가 자문회의를 통해 국내에서 성별과 젠더 분석 적용이 가능한 사례 7가지를 발굴해 제안하고 있다.
구체적 내용을 보면, 여성이 남성에 비해 20~25% 폐활량이 적고, 얼굴 형태도 다르지만 호흡기 마스크는 남성의 얼굴 모양과 호흡속도에 맞춰 제작된다. 연구진은 이 부분에 착안해 성별에 따른 폐활량 차이를 해소할 필터 시스템과 얼굴형에 따른 디자인 개발을 제안했다. 이와 함께 65세 이상 여성에게 발병률이 높은 대장암을 치료할 때 여성의 생리주기를 고려하고, 우울증이나 자살 기도 비율은 여성이 높지만, 실제 자살률은 남성이 높은 통계를 토대로 성별의 차이를 고려한 자살 예방과 치료 정책 마련을 제안했다. 또 공학 분야의 낮은 여성 참여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교과 과정에 여성친화적 과학 개념을 도입하는 방안도 제시했다.
연구를 총괄한 백희영 한국여성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은 보고서에서 “젠더혁신 7가지 사례 연구를 통해 국내 과학기술 분야 젠더혁신의 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라며 연구 결과를 토대로 국가연구개발사업의 관리 등에 관한 규정과 국내 연구재단 등재 전문학술지 규정을 성별과 젠더를 고려해 개선하고, 지속적으로 젠더혁신 사례를 발굴할 것으로 강조했다.
한편 한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는 내년 가을께 서울에서 과학기술 분야 국제회의인 ‘젠더 서밋(Gender Summit 2015 Asia-Pacific)’을 개최한다. 이번 젠더 서밋에서는 국내외 젠더혁신 사례를 공유하고 과학기술 분야 양성평등에 대한 논의를 아시아·태평양 지역으로 확산하기 위한 로드맵이 마련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