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여성 중 다섯 손사락 안에 꼽히는 국제통화기금(IMF) 총재 크리스틴 라가르드. 1956년 1월 1일생인 그는 180㎝의 큰 키에 샤넬을 즐겨 입고 패셔너블한 팔찌에 에르메스를 든 패션으로 보그 잡지의 표지를 장식하기도 했다. 프랑스의 패션 감각을 자랑하며 속이 비치는 시스루를 입기도 하고 핑크색, 노란색, 하늘색 정장도 소화해낸다. 188개 회원국의 국제금융기구인 IMF를 이끌고 있는 그녀는 2011년 7월 5일 취임 후 3년을 전 세계의 재정위기 상황을 다루느라 바삐 보냈으며 최근에는 갈등 상황을 겪고 있는 우크라이나에 170억 달러(17조원)의 대출을 승인하기도 했다.

라가르드는 대학 교수인 아버지와 고등학교 라틴어 교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3남1녀 중 맏딸로 태어났다. 교육자인 부모는 지적인 대화가 오고 가는 만찬 파티를 자주 베풀었고 아이들을 오페라에 데리고 다니며 열린 교육환경을 제공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남자놈들에게 지지 말라.(Don’t let the bastards get you)”고 말하곤 했는데, 라가르드는 그것이 자기에게는 최고의 조언이었다고 한다. 팔방미인인 그녀는 중·고등학교 때는 수중발레 국가대표 선수로 출전하기도 했다. 58세인 지금도 수영과 헬스를 하며, 일주일에 한 번은 자전거로 20㎞를 달린다.

라가르드의 성공 배경에는 영어와 불어를 유창하게 하는 언어 재능이 있다. 17세 때 아버지가 사망한 후, 라가르드는 미국 정부의 장학금을 받아 메릴랜드주의 베데스다에 있는 홀튼암스 학교에서 유학했다. 미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국회의사당 인턴으로 하원의원 윌리엄 코헨이 워터게이트 청문회 기간에 불어를 사용하는 지역주민들에게 불어로 편지 보내는 일을 도왔고, 이때 법과 정치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다. 

파리로 돌아온 라가르드는 프랑스 명문 파리 10대학에서 영어, 노동법, 사회법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액상 프로방스 정치대학원에서도 또 하나의 석사학위를 받았다.

석사학위를 받은 후 그녀는 공무원 시험에 두 번이나 떨어지고, 변호사가 됐다. 여성이기 때문에 프랑스 법률사무소의 파트너는 결코 될 수 없으리라는 말을 들었으나 1981년 미국 시카고에 기반을 둔 저명한 국제 법률회사인 베이커앤드매킨지에 취업해 주요한 독과점 금지 및 노동법 사건들을 다루며 실력을 인정받게 됐다.  6년 후에는 파트너(부사장급)가 됐고 서부 유럽 지사의 사장이 되는 등 승승장구했다. 1995년 집행위원회에 들어가 1999년 10월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법률회사 대표로 취임하고 2004년에는 글로벌 전략위원회 위원장이 된다.  

이처럼 라가르드는 23년을 미국에서 변호사 생활을 해서 문화적인 차이가 있긴 하지만 보통 프랑스 여성 정치인과는 많이 다르고 이것이 그녀의 장점이라는 평을 듣는다. 업무 스타일이 미국식이어서 ‘라 아메리칸느(미국 여자)’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합리적인 사고관, 솔직하고 직설적인 표현이 장점이다. 또 많은 프랑스 여성 정치인처럼 우아한 척 여자다운 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라가르드는 미국 사람처럼 격식을 차리지 않고, 자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면서도 인품이 따뜻하며 필요한 경우에는 웃기기도 한다. 두 가지로 성격을 압축해서 표현한다면, 독립적이고 절제된 여성이라고 한다.

라가르드의 최대 장점은 협상력이며, 이 협상력으로 국내외의 경제적 난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뛰어난 성과를 올렸다. 2005년 프랑스 총리는 시카고에 사는 그녀에게 주요 8개국(G8) 중 최초의 여성 산업통상부 장관이 되어달라고 요청했고, 라가르드는 급히 떠나느라 안경까지 놓고 갈 지경이었다고 한다. 23년간의 미국 생활을 접은 그녀는 프랑스의 재무부 장관으로 테크놀러지 등 프랑스 상품의 새로운 시장을 개방하는 데 우선순위를 두었다. 한편 프랑스의 노동자 복지가 너무 과도하게 발달하여 휴일이 많고 주 35시간밖에 일하지 않는 것에 대해 노동법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노동자에게는 인기가 없는 정책이었다. 

라가르드는 또한 독일을 설득하여 프랑스 레스토랑에서 부가세를 줄이는 것에 반대하지 못하게 했고 은행 직원의 보너스에 과세하는 정책을 도입했다. 미국에서 보험회사 AIG가 망하기 전날 밤 미국 재무장관에게 전화해서 망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고 15초 만에 설득하기도 했다.

2007년 5월에는 농수산부 장관이 되고, 그 다음 달에는 경제재무고용부 장관이 되어 첫 여성 재무장관에 기용된 후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그리스, 아일랜드, 포르투갈 재정위기가 발생하자 유럽 각국의 서로 다른 입장을 중간에서 조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2009년에 파이낸셜타임스는 그녀를 유럽연합(EU)에서 가정 탁월한 재무장관이라고 지목했다. 

 

협상능력을 인정받은 라가르드는 2011년 5월 25일 스캔들로 사임한 도미니크 스트라우스 칸의 뒤를 이어 IMF 총재후보가 됐다. 멕시코 은행장 아구스틴 카르스텐스 역시 입후보했으나 6월 28일 라가르드가 5년 임기의 총재로 확정된다.  최초의 여성 IMF 총재로 결정될 때 유럽이 총재직을 독점한다고 불평하던 중국의 표를 얻어야 했는데 중국의 중앙은행 총재와 오찬을 하고 부총통을 한 번 만난 것으로 지지를 이끌어낸 것은 전설처럼 회자된다.

라가르드가 IMF 총재가 된 후 해결해야 했던 가장 심각한 것은 전 세계적인 문제 중에서도 그리스의 채무 불이행 위기였다. 미국 재무장관 티모시 가이트너는 “세계 경제의 핵심 위기의 해결에 불가결한 IMF에 리더십을 제공할 탁월한 재능과 연륜”을 가진 라가르드가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고 치하했다.  IMF에서 17년 동안 활동했던 에스와르 프라사드 브루킹스연구소는 “IMF의 개혁을 위해 유럽 회원국들의 팔을 비틀 수 있는 인물”이라고 라가르드를 평가했다.

라가르드는 세계 경제가 위기에 처해 있으며 부채를 줄이고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 유럽인들이 단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스는 그동안 복지를 흥청망청 즐겼지만 이제는 대가를 치러야 할 시간이다. 그리스가 재정적자를 줄이고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노력한 점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세금 징수를 비롯해 더 넓은 범위의 구조 개혁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그러나 1년 후에는 더 채무 탕감을 하지 않는 한 그리스는 회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스 부채 수준을 줄이는 데 있어서 목표를 두고 라가르드가 공개적으로 유로권 재무장관들과 충돌한 후 IMF와 EU의 갈등이 표면화되기도 했다. 현재 그녀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국제 공조를 이끌어 위기 극복에 일조했다는 우호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2016년 임기가 끝날 때까지 그녀는 계속 세계 경제위기와 싸워야 한다. 최근 신문 인터뷰에서 라가르드는 “성공은 끝없는 전투와 같다. 매일 새로 능력을 시험받아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한편 직권남용 혐의로 재판이 진행 중이기도 하다. 프랑스 재무장관 재임 시절, 국영 크리디리요네은행과 아디다스 간 분쟁이 일었을 때 직권을 남용해 기업주에게 특혜를 줬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당시 두 회사의 중재 역할을 맡았던 라가르드는 아디다스의 전 소유주 베르나르 타피에게 2억8500만 유로(약 4100억원)의 보상금을 지급하는 결정이 내려지는 데 모종의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라가르드는 두 번 이혼했으며 첫 남편과의 사이에 20대의 두 아들이 있다. 시카고에 살 때 영국 사업가와 사랑에 빠져 두 번째 결혼했다. 2006년 산업통상부 장관일 때 프랑스의 마르세유에 가서 그 지역의 사업가들과 회의를 하곤 했는데, 그때 만난 법대 동기 사업가 하비에 지오칸티와 지금까지 동거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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