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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군이 지난 연말 복원한 남자현 지사의 생가.

81주년 3.1절을 맞아 남성 중심의 ‘보여진’ 독립운동 흐름 속에서

3.1 만세운동을 정점으로 여성들이 어떻게 한민족의 혼과 독립의 맥을

이어왔나를 생각하게 된다. 유관순, 김마리아 등 3.1운동사에 굵디 굵

은 족적을 남긴 여성투사들 외에도 대중에겐 낯선 많은 여성들이 3.1

운동을 정점으로 구국운동에 혼신의 힘을 다해 왔다. 이들중 평범한

주부로 항일운동에 투신함으로써 무력투쟁에 여성 참여는 불가능하다

는 편견을 뛰어넘은 몇몇 여성들을 살펴본다.

47세에 독립운동 뛰어든 남자현

지난 해 12월 경북 영양군은 97년부터 시작한 영양군 출신의 한 여성

독립운동가의 대대적인 생가 성역화 작업에 마침표를 찍었다. 의병으

로 활약한 남편 전사 후 독립운동에 투신한 남자현 지사(1872-1933)는

만주벌판을 누빈 대표적인 여성 항일투사. 남 지사는 3.1운동 직전 연

희전문학교 부근 교회당에서 전달 받은 ‘독립선언서’를 3월 1일 오

후 각 처에 배부했고, 이후 3.1운동 좌절 후 국내에서의 항일운동이 불

가능하다고 판단, 아들 김성삼을 데리고 중국 요녕성으로 망명해 활약

했다. 자신은 서로군정서에 입단해 본격적으로 항일운동을 폈고, 아들

은 독립군 양성기관인 신흥무관학교에 입학시켜 독립군의 자질을 갖추

도록 했다. 교회, 여자교육회 조직, 독립군 양성, 문맹퇴치 운동을 비롯

하여 국경을 넘나들며 군자금 조달을 하는 등 그의 활동은 다양했다.

특히 1931년 일제의 만주침략 조사를 위해 국제연맹이 파견한 리턴조

사단을 만나 세계에 한국의 독립의지를 알리고자 왼손 무명지 두 마디

를 잘라 혈서로 독립청원서를 쓴 후 그 두 무명지를 천으로 싸서 조사

단에 보낸 일화는 유명하다. 32년 일제 괴뢰정권 만주국 전권대사 부

토를 암살하려다가 하얼빈에서 체포된 남 지사는 체포 당시 남편의 피

묻은 의병군복을 지니고 있었을 정도로 항일 의지가 철두철미했다. 이

후 모진 고문에도 불구하고 혼자 거사를 꾸민 것이라 일관되게 주장,

함께 체포된 동지 2명을 석방시킨 후 17일간의 단식투쟁 끝에 61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남 지사는 전통적 유학자 가문에서 태어나 47세의

나이에 항일운동에 뛰어들어 50대를 만주벌판에서 무장 항일투쟁에 바

친, 주부 늦깎이 독립운동가로 후대에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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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격한 유교 가풍에서 집안 식구들의 만류를 무릅쓰고 '안사람 의병단'

을 조직한 윤희순 지사.

남 지사의 선배 격으로 구한말부터 항일운동에 참여했던 윤희순 지사

(1860-1935)는 ‘안사람 의병단’을 이끈 여장부. 가부장적 유교적 내

훈이 강조되던 시대에 ‘안사람 의병가’를 지어 여성민족운동을 선도

했다. “...아무리 여자인들 나라사랑 모를소냐 우리도 의병하러 나가보

세...우리 안사람 만만세로다”란 가사를 붙여 문중 안사람들의 의병활

동부터 독려했던 윤 지사는 전장에 나간 집안 남자들을 대신해 집안을

지키라는 시아버지 이하 여러 식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의병활동에

전념했다.

그는 타처의 의병들이 마을에 오면 그들의 수발을 들며 마을 여성들

이 의병들을 돕도록 연설을 하곤 했다. “구국 의리에 남녀 구별이 어

디 있는가”란 그의 연설 요지는 엄격한 유교 가정 속에서도 일찍부터

남녀 평등의식을 키워왔음을 암시한다. 그는 특히 “우리 조선 안사람

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줄 아느냐, 우리 안사람도 의병을 할 것이다”

란 ‘왜놈 대장 보거라’란 경고문으로 대담함을 과시하기도 했다.

1907년 일제의 고종황제 강제 폐위와 한국군 해산 후 격렬한 의병전쟁

이 일어나자 여자 의병 30명을 모집하기도 한 윤 지사는 1910년 한일

합방 후 시아버지를 따라 중국으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1913년 시아

버지가 타계하고 1915년에는 남편이 왜경에 체포돼 순사, 이후 그의

마지막 희망인 큰아들 역시 체포돼 고문 끝에 1935년 숨진 지 10여 일

만에 7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3.1운동으로 서대문감옥에 구금돼 있던 황애덕 지사를 격려했던, 이름

이 알려지지 않은 60대의 두 할머니도 빼놓을 수 없다. 이들은 기독교

신자로 강원도 철원에서의 만세운동 참가 후 기소돼 황 지사와 6개월

함께 기거했다. 평생을 전업주부로 살아 왔을 이 두 할머니는 갇힌 학

생들을 격려해 독립만세 선창을 주도했고, 여간수들이 달려와 채찍으

로 갈기고 시멘트 복도에 밤 늦도록 꿇어앉히며 밥을 굶겨도 아랑곳하

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이들은 “고무공은 칠수록 높이 뛰어오르는

법이야. 우리의 저항정신도 마찬가지 아닌가”란 말로써 여학생들의

사기를 북돋우곤 했다고 황 지사는 회고했다.

유교 가풍에서도 ‘안사남 의병단’ 조직한 윤희순

평양 남산현교회 신흥식 목사의 어머니 역시 후대에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들이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맡은 바 소임을 다하

게 한 원동력이 됐다. 거사 직전 어머니 앞에서 마지막 인사가 될지도

모르는 인사를 하는 신 목사를 보고 모든 가족이 흐느끼는 가운데 오

직 이 노모만이 초연한 태도로 아들의 결정을 독려, 주위로부터 “과

연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란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

이처럼 일제 당시 여성들의 항일의식은 집안 사랑이 곧 나라 사랑이

라는 신념이 토대가 된 것으로, 유교 윤리인 충효사상 역시 애국 의지

를 불사르게 했음을 알 수 있다.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가족 이기주

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후세에 애국심을 계속 고취시키기 위해 윤희순

지사가 지은 '일생록'에서도 충효정신을 결코 잊지 말기를 당부하고

있다.

한국 역사 속에서 여성의 ‘자리 찾기’에 전념하는 이배용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는 일제시대 여성들의 항일운동에 대해 “여성이 ‘깨어

난’ 시기는 일천하지만 이후 여성의식의 성장은 놀랄 만했다. 이들은

여성해방과 동일 선상에서 민족해방을 바라보고 저력을 발휘해 왔다.

여기엔 아이러니칼하게도 유교적 충효사상이 큰 몫을 했다”고 평한

다. 여성들의 구국운동 면면은 항일투쟁에 직접 앞장선 가시화된 움직

임도 있지만, 교육계몽 운동, 경제자립 운동, 여성단체 조직을 통한 운

동, 독립운동 자금 조달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했고, 이것이 바로 여

성들의 독립의지를 확산시키고 운동의 지속력을 갖게 해줬다는 해석도

덧붙인다. 여성에 대한 사회인식을 높이는 계기가 됐음은 물론이다. 그

중에서도 이 교수가 ‘보이지는 않지만 대단한 잠재력을 가진’ 여성

들의 독립운동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보는 점은 바로 항일정

신을 고취시킨 당시 여성들의 가정교육. 윤봉길, 김구 의사 뒤엔 ‘어

머니’의 큰 그림자가 있다는 것이다. 이를 충분히 인식한 일제는 30

년대에 한국인 남성과 일본 여성을 결혼시켜 민족혼을 꺾고자 하는 정

책을 강력히 밀고 나가기도 했다.

여성해방·민족해방·충효사상 잘 조화시켜

이 교수는 한일합방이 일제의 왜곡 선전으로 인해 대한제국이 ‘스스

로’ 종속을 원한 결과라고 전세계에 알려진 반면, 3.1운동은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전세계에 알린 계기였다는 데서 의의를 찾는다. 따라서 일

본 패전 후 한민족의 독립은 거론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었다. 같은 맥

락에서 유관순, 김마리아부터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초로의 할머니까

지 그 시대 모든 여성들의 삶에서의 항일운동은 결국 해방 후 1948년

여성이 첫 참정권을 획득하는 토양이 됐다.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들은 ‘출가외인’이란 제약으로 기록조차

변변히 남지 않은 이들 여성들의 항일운동사를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새롭게 평가하고 계속적으로 발굴해 나가며 여성 역사를 ‘다시’ 쓰

는 것이다. 이럴 때 비로소 보훈처에 등록된 남성 독립유공자는 8천6

백98명인데 반해 여성 독립유공자는 1백40명이란 엄청난 격차를 좁혀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참고자료; '한국 역사 속의 여성인물'(한국여성개발원), '한국여성사

정립을 위한 인물유형 연구'(이화여대 한국 여성연구소), '한국 근대

여성사-추계 최은희 전집'(조선일보사), 월간 '순국' 2월호.

'박이 은경 기자 pleun@wome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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