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현덕 한국캘리그라피협회장 “우리 모두 캘리그래퍼입니다”

하얀색 벽 위에 걸린 액자에 지필묵으로 써 내려간 ‘성평등은 모두를 위한 진보다’라는 작품에서 강력한 문장의 힘이 느껴진다. 서울 영등포구 여성미래센터 허스토리홀에 전시된 유현덕(55·사진) 한국캘리그라피협회장의 작품이다. 유 회장은 협회 회원 30명과 함께 ‘3·8 세계 여성의 날’ 기념 특별전 ‘성평등, 우리가 걸어온 길, 캘리그래피전’에 참여했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이 매년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해 개최하는 한국여성대회 역대 슬로건을 모두 작품화한 전시회다. 첫해 표어인 ‘민족, 민주 민중과 함께하는 여성운동’부터 ‘여성들의 한 표로 세상을 바꾸자’(1992년), ‘성매매 방지법 제정·호주제 폐지·보육의 공공성 확보’(2002년), ‘그녀에게 빵과 장미를’(2011년) 등 작품을 보노라면 여성 이슈의 역사와 흐름이 한눈에 들어온다.

유 회장은 한국여성단체연합으로부터 전시회 제안을 받고 “1분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수락했다”고 했다. 이전까지 여성단체와 인연은 없었지만 “캘리그래피는 배워서 남 주는 것”이라는 신념 때문이었다. 그와 회원들 모두 이번 전시에도 재능 기부 차원으로 참여했다.

“캘리그래피는 ‘예쁘기만한’ 글씨가 아닙니다. 캘리그래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쓰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쓰느냐예요. 글을 쓰는 사람이 충분히 이해하고 소화하지 못한 문구를 쓰는 것은 솔직하지 못한 것이죠. 캘리그래피는 ‘솔직함’이거든요. 그래서 캘리그래퍼(캘리그래피 작가)는 시인이자 평론가가 돼야 해요.”

유 회장은 이번 작품을 1남1녀를 둔 아버지 입장에서 썼다. 특히 육군 중위로 복무 중인 아들을 생각하면서 작업을 하다 보니 “복잡미묘했다”고 솔직히 털어놨다. 최근 군대 내에서 연이어 벌어진 성폭력과 폭행 문제로 군대 자체에 대한 비난 여론이 일어난 것에 대해서도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그는 “성평등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충분히 공감한다”면서 “조화가 어긋날 때 문제가 발생한다”는 생각을 전했다.

1983년부터 대기업에서 광고 제작 일을 했던 유 회장은 캘리그래피라는 말조차 생소하던 시절부터 캘리그래피를 디자인에 적용해 왔다. 한국캘리그라피협회를 만든 것은 지난 2013년이다. 5년 전부터 캘리그래피가 대중의 폭발적 관심을 끌기 시작하면서 캘리그래피를 문화가 아닌 단순히 예쁜 글씨와 돈벌이 수단으로만 여기는 인식을 바꾸기 위해서다. 그는 이를 위해 캘리그래피를 알리는 일이라면 전국 어디든지 달려갔다. 특히 소속 작가들과 함께 나눔을 위한 유니세프, 환경재단 등 시민단체 행사에 적극 참여했다. 그는 대중과의 소통을 위해 오는 4월 한국시인협회와 함께 경기 파주 헤이리에서 일종의 문화 대학인 ‘서원’을 열 계획이다.

유 회장은 캘리그래피는 체계적으로 배우고 예쁘게 써야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글을 쓰는 누구나 캘리그래퍼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전 세계에 한글 캘리그래퍼가 1억 명 정도 돼요. 한글을 쓸 줄 아는 사람은 모두 캘리그래퍼라는 거죠. 자신의 고유한 글씨를 디자인적으로 정리하는 방법만 알면 됩니다. 잘 쓰고 못 쓰고는 중요치 않아요. 얼마만큼 마음에서 우러나온 솔직한 글인지가 중요하죠. 앞으로도 캘리그래피로 소통하고 마음을 전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