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의 부인이자 정조의 어머니였던 혜경궁 홍씨는 기구한 운명을 온몸으로 받아낸 여인이다. 노론 명문가에서 태어나 10살에 궁중에 들어가 사도세자의 부인이 됐지만, 스물여덟 살에 남편이 뒤주에 갇혀 죽는 걸 목도해야만 했다. 애타는 삶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마흔두 살에 아들 정조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정조는 왕의 일에 사사건건 방해를 놓았던 외가를 가만두지 않았다. 아들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더 큰 나락으로 떨어지는 전초전이었다. 손자 순조가 왕위에 올랐음에도 다시 정순왕후가 권력을 잡으면서 한 많은 삶을 감내해야만 했다. 80년 가까운 세월을 살았지만 혜경궁 홍씨의 삶은 부침의 연속이었다. 그 파란만장한 기록이 바로 『한중록』에 고스란히 전해진다.
사도세자 혹은 정조를 소재로 한 사극이나 영화는 종종 혜경궁 홍씨를 정치적 인물로 묘사하지만, 혜경궁은 그저 평범한 여인이었다. 『한중록』의 서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1762년 경모궁(景慕宮·사도세자)의 죽음은 천고에 없는 변이라.” 정치적 지형을 따라 세자빈으로 간택됐지만 백년해로하기로 약조한 남편이 상상치도 못한 방법으로 죽었다. 남편을 졸지에 잃은 혜경궁 홍씨의 심사를 직접 들어보자.
“나는 차마 그 모습을 헤아리지 못하니, 그때 내 마음은 굶어 죽으려고도 하고, 깊은 물에 들고도 싶고, 수건을 어루만지며 목을 맬 생각도 하고, 칼을 들기도 여러 번 하되, 약한 성격으로 강한 결단을 못 하였으나, 밥을 먹을 수가 없어 미음이나 냉수조차 먹은 일이 없으되, 능히 지탱은 하였더라.”
신하들은 영조가 두려워 상복도 제대로 입지 못했다. 혜경궁 홍씨는 가만히 “이 지경을 당하니 세손이나 건지는 것이 천은이라 하겠더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남편이 죽고 40여 년이 지난 후에야 쓴 『한중록』에는 그날의 일을 다 기록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한다. “경모궁 돌아가신 경위를 내 차마 기록할 마음이 없으나, 다시 생각하니, 경모궁 손자이신 순조가 그때 일을 망연히 모르는 것이 망극하고, 또한 옳고 그름을 분별치 못하실까 안타까워, 마지못하여 이리 기록하나, 그중 차마 못 일컬을 일은 뺀 것이 많도다.”
혜경궁 홍씨는 인생을 정리하며 『한중록』을 쓰면서도 젊은 날 당한 아픔과 치욕 때문에 “화가 치밀어 등이 뜨거워 잠을 자지 못했다”고 한다. 어떤 날은 “누워 자려다가 벌떡 일어나 앉아 벽을 두드리기도 했다”고 하니 차마 말과 글로는 다 할 수 없는 슬픔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이의 글은 오늘 우리에게 남아 역사의 한 자락을 설명해 주거니와, 아름다운 한 권 책을 선사했다. 소설가 이태준은 『문장강화』에서 『한중록』을 “조선의 산문 고전”이라고 일컬었다. 뜨거운 가슴과 유려한 문장이 만나 한 편의 고전을 탄생시켰다는 것이다.
『한중록』을 읽고 있노라면, 우리 역사가 한순간도 바람 잘 날이 없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 바람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한 평생을 인내했던 여인 혜경궁 홍씨. 언제 다시 사극이나 영화에서 만나게 될지 알 수 없으니 『한중록』으로 혜경궁 홍씨를 만나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