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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이 넘은 나이, 게다가 대학교수직에 있는 여성이라면 그 모습을

우리는 쉽게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예상을 뒤엎는, ‘사회적

지위와 체면’과는 거리가 먼 별난 페미니스트 교수가 있다. 바로 조

한혜정(52·연세대 사회학과). 그는 외모에서부터 우리를 배반한다.

허리까지 찰랑찰랑한 긴 생머리, 정장은 고사하고 희끗희끗한 머리만

아니면 학생인지 교수인지 구별이 안 될 캐주얼 복장. “세상이 좀 달

라졌으면 좋겠다”며 끊임없이 주위 사람들을 부추기는 일도 그의 특

기. 권위적이고 획일적인 사회 체질을 바꾸기 위해 ‘또하나의문화’

동인들과 함께, 이젠 10대들과 함께 시대적 돌파구를 위해‘하자센

터’에서 일을 꾸미는 그는 결코 나이에 몸과 정신을 가두지 않는

‘무늬만 기성세대’다.

“페미니즘이 빨리 디지털 비행선을 갈아타야 한다”고 말하는 그는

시대적 흐름을 먼저 읽고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 끊임없이 자기를 성찰하며, 새로운 대안 세상을 설계하고 그것

을 현실에서 실험하고 실천하는 페미니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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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영향 덕분에 일찍이 급진적으로 자유로웠던 외할머니와 드물

게 건강한 상식을 가진 어머니, 말이 잘 통해 가장 친했던 이모 등 그

의 주변에는 항상 지혜로운 여성들이 많았고, 그런 환경은 그가 페미

니스트가 되는 자양분이 되었다.

대학에서 사학을 공부하다 대학원에서 다시 선택한 인류학도 그에겐

큰 영향을 미쳤다. 남산 부락굿을 소재로 학사논문을 쓰면서 질적 연

구방법과 인류학에 관심을 갖게 됐고, 본격적인 공부를 위해 미국으

로 유학을 떠났다. 인류학은 일상세계의 권력구조를 비판적인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며, 현 사회를 보다 나은 사회로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현장 속에서 찾는 학문이었다.

“여성 문제에 대한 관심은 내가 여성이기 때문에 갖게 된 직접적 체

험에 따른 것이었다기 보다는, 인간 사회에 존재하는 갖가지 불평등

현상에 대한 이성적 성찰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귀

국 후 인류학회에서 그는 “사회 불평등 현상의 본질을 피억압 집단

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은 채’존재하는 데 있다”는 내용의 발표

를 했다. 그에겐 “당연히 존재하는데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존

재”들이 바로 여성이었고, 여성들의 존재가 보이고 들리게끔 하는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 중 하나가 ‘또하나의문화’다.

‘또문’에서 그는 본격적으로 여성해방운동을 시작했다. 대학에서

‘성과 사회’강의를 시작하면서 많은 학생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

을 통해 “사람들은 대안이 없다고 느낄 때는 억압을 참아낼 수밖에

없고, 보수적이지 않을 때 받는 사회적 압력이란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었다고. 이에 젊은이들과 함께 대안적 문화를 만들 수 있는 모

임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뜻 맞는 이들과 함께 의기투합한 결과 ‘또

하나의 문화’가 탄생했다.‘또문’ 동인들과 함께 할 수 있었던 건

그에겐 대단한 행운이라고 말한다.‘또문’에서 그는 “이리저리 흩

어져 있던 수많은 ‘나’를 만났고”,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지혜를

지닌 많은 여성들과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자매애를 나눌 수 있었

다. 무엇보다‘또문’은 그가 대학내 여교수라는 소수의 위치에서도

거침없이 당당히 발언할 수 있도록 든든한 ‘백’이 돼 주었다.

페미니스트가 청소년들의 ‘대모’?

여성운동 가운데는 심한 억압으로 치유의 과정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

한 운동도 있고, 치유의 과정보다는 내가 살고 싶은 세상을 그리고 만

들어내는 운동이 있다. 그의 운동은 후자에 속한다. ‘또문’을 비롯해

그가 지금까지 벌여온 운동의 특성은 현재의 삶을 바꾸기 위해‘대안

적인 세상을 상상하기’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십대들과도 만나게 됐다.

그의 주위엔 유독 젊은이들이 많다. 대학에서 만난 제자들부터 십대

에 이르는 어린 친구들까지 다양하다. 그래서 이들이‘조혜정 군단’

을 이루고, 그에게 영향을 받은 ‘신촌 페미니즘’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 대안을 만드는 운동의 특성상 자연히 젊

은이들과 함께 할 수밖에 없다는 게 그의 설명이지만, 그처럼 신세대

못지 않은 튀는 사고와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고, 젊은이들이 따를 수

있는‘어른’이란 흔치 않은 것도 사실이다.

요즘 그가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 청소년 문제다. 여성운동을

하다가 웬 청소년운동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그에게 대안문화운동이

라는 점에선 같다. 게다가 청소년문화운동의 싹은 ‘또문’에서부터

자랐다.‘또문’에서 학교 교육을 거부하고 자퇴한 후 힘들어 하는

아이들을 지켜 보았고, 먹고 살 걱정을 하는 젊은 예비 실업자들을 만

났다. 그래서 그가 착수한 것이 ‘일하면서 배우는’ 대안적인 교육

공간을 만드는 것. 현재 그는 영등포에서 서울 시립으로 운영하는

청소년직업체험센터인 ‘하자센터’의 관장직을 맡고 있고, 이젠

‘청소년의 대모’로 불린다.

그는 학교 안과 밖, 가정 안과 밖의 경계가 중요치 않은 사람이다.

경계를 넘나들며 그가 사는 모습은 똑같다. 스스로도‘이중 생활’이

라는 것이 없다고. 대학 안에서도 그는 실험적인 강의를 한다. 그는 수

업에서 ‘집만 지어놓고 떠나버리는 통큰 엄마’다. 대신 학생들이

스스로 프로젝트를 수행한다. 사이버 수업으로 진행하는‘지구촌 시

대의 문화인류학’에선 인류학의 핵심인 문화적 상대주의를 바탕으로

학생들이 스스로 하고 싶은 기획들을 해낸다. 260명의 수강생들이 인

터넷으로 시공간을 초월해 의사소통을 하고 기획한다. 다른 수업에서

도 그의 수강생들은 캠퍼스 어디선가 판을 벌린다. 까페를 빌려 대중

음악사를 훑는 음악회를 열거나, 옛 놀이나 음식문화를 재현하면서 자

기 존재를 성찰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는 강의에서 학생 스스로 수행한 프로젝트를 통해 다양성을 보여

주는 것, 학생 스스로 자신을 업그레이드하도록 만드는 것이 목적이

란다. 그가 생각하는 교수의 역할은 지식을 주입시키는 사람이 아니라

‘기획자’다. 그래서 그는 ‘벤처교수’라고도 불린다.

그에겐 가정도 하나의 실험 공간이다. 아이를 낳느냐 낳지 않느냐 하

는 문제에서부터, 어떻게 기를 것인가 하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남편

과 함께 토론하고 실천했다. 그가 ‘평등한 부모’가 되고자 노력하고,

‘자유로운 아이’로 키우고자 고민했던 과정은 '또하나의문화'

(제1호)에 이미 소개돼 화제가 된 바 있다.

그의 결혼 생활은 26년째를 맞고 있다. 한국과학기술원 공학부 전자

전산학과 교수로 재직중인 그의 남편 전길남(57) 씨는 자타가 공인하

는 ‘인터넷 대부’로 알려져 있다. 영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인류학

자’와 ‘컴퓨터쟁이’ 의 만남이지만, 실제는 무척 비숫하면서 상호

보완적인 관계다. 재일교포 출신으로, 기본적으로 소수집단에 가해지는

억압에 대한 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의 남편은 무엇보다 차별이

나 억압에 대해 단호한 입장을 갖고 있다. 그래서 남편은 그 나름의

페미니스트다. ‘또문’일에 직접 관여는 하지 않더라도, ‘또문’ 망

년회 때 따뜻한 요리를 준비해 주는 등으로 남자가 페미니스트로서 할

수 있는 일을 기꺼이 맡아 한다.

두 사람 사이에는 주원(22), 해원(20) 남매가 있다. 어려서부터 ‘또

문’에서 살다시피 한 두자녀는 그들의 바람대로 기존 사회에‘적절하

게 적응 못 하는 아이’로 자랐다. 딸 주원 씨는 자유로운 표현이 가

능한 현대무용을 전공하고 있고, 해원 씨는 경제학을 전공 중이다. 특

히 해원 씨는 획일적이고 권위적인 교육 풍토에 반기를 들어 자퇴를

감행하기도 했고, 여성운동의 일환인 ‘부모성 함께 쓰기’를 실천하

고 있는 엄마 못지 않은 페미니스트다. 또 지난해 페미니스트들의 축

제였던 안티미스코리아대회에 유일한 남자로 출전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인도 여행을 자주 떠나는 주원 씨는‘부모성 함께 쓰기 운동’

등에는 관심이 없다. 엄마가 하는 ‘이성적 여성운동’과는 또다른 차

원에서 새로운 페미니스트의 싹을 키우고 있다.

학교·가정 내겐 모두 ‘실험실’

그는 그간 20년, 사회변화와 여성운동의 결과로 혼자서도 씩씩하게

잘 살 수 있는 여성들이 많이 생겨났다고 말한다. 이젠 여남의 양분화

현상이 심화됐을 때 소외된 남자들의 행보에 대해서도 분석해 봐야

한다고 말한다.

“아버지의 왕국이 몰락하고, 코너에 몰린 남성들의 횡포는 더 심해질

수 있어요. 여성운동에서 남성들의 자리에 대해서 충분히 계산을 하

고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여자와 남자의 거리가 점점 커지는 현상에

주목해야 한다는 거죠. 여성들이 당당하게 살면서, 또 복수할 생각을

갖는 남성들이 생겨나지 않도록 ‘따로 또 같이’세상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공존하는 방법을 찾고 연습을 하는 일도 중

요하다고 말한다.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모든 장에서 남성과

함께 함으로써 공존을 실천해 가야 한다고. 그는 조만간 전 지구 여성

들과 인터넷을 통해 사이버 공간에서 만나 새로운 대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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