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원고 정지아 엄마 지영희씨 “단원고 졸업 때까지 사망 신고 안 해”
2학년 2반 희생자 중 외동아이만 3명

“작년에 사고로 아들을 잃었다. (중략) 마지막으로 어미의 배를 빌려 태어난 이 땅의 아들딸들아, 제발 죽지만 말아다오. 남을 죽일 위험이 있는 짓도 말아다오. 설령 네 목숨과 지상의 낙원을 바꿀 수 있다 해도 네 어미는 결코 그 낙원에 못 들지니.”

고 박완서 작가가 쓴 ‘어미의 5월’ 중 한 대목이다. 이 글에서 세월호로 자식을 잃은 부모들을 떠올렸다는 이들이 많다. 자식을 먼저 저세상으로 보낸 것을 ‘참척(慘慽)’이라 한다. 세상에서 가장 참혹한 근심이란 뜻이다. 세월호 1주기(16일)를 앞두고 만난 단원고 유가족들은 바로 이 참척의 고통을 겪고 있었다.

 

2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 세월호 농성장 앞에서 열린 특별법 무력화 정부 시행령 폐기와 세월호 인양 촉구, 배보상 절차 전면중단’ 기자회견에서 세월호 유가족들이 삭발을 마치고 오열하고 있다.gabapentin generic for what http://lensbyluca.com/generic/for/what gabapentin generic for whatwhat is the generic for bystolic   bystolic coupon 2013cialis coupon free   cialis trial couponprescription drug discount cards cialis prescription coupon cialis trial coup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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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시스‧여성신문

단원고 희생자인 정지아(2학년 2반)양의 엄마 지영희(49)씨는 “다시 4월이 왔지만 엄마들의 시계는 2014년 4월 16일에 멈춰 있다”고 말했다. 계절이 세 번 지났고 새봄을 맞았지만 유가족들은 세월의 흐름을 느끼지 못했다. 지씨는 활짝 핀 벚꽃을 볼 때마다 마음이 미어진다고 했다. 단원고부터 단원중까지 쭉 연결되던 벚꽃길을 외동딸과 팔짱을 끼고 걸으면서 “예쁘다”고 감탄하던 기억이 생생하기 때문이다. 교정의 벚꽃나무 밑에서 아이가 단짝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고나면 그리움으로 마음이 젖어든다. 단짝 친구 6명 중 살아남은 아이는 단 한 명뿐이다.

“지아가 배를 탄 지 9일 만에 나왔어요. 그날이 4월 24일이었어요. 처음에는 이름이 불리는 게 너무 무서워서 울었고 일주일이 넘어가니까 이름이 안 불릴까봐 무서웠어요.” 지옥이 따로 없었다. 꿈 많던 열일곱 살 지아를 그렇게 잃었다. 딸은 박물관 큐레이터도, 작가도 되고 싶어 했다. 무엇보다 엄마에게 친구 같은 딸이 되고 싶어 했다. 지씨는 “동네에서 지아랑 다니면 아줌마들이 다들 부러워했다. 친구들이 ‘엄마랑 너랑 친한 걸 보니 부럽다. 우리 엄마도 나랑 그랬으면 좋겠다’고 했다며 지아가 자랑하듯 말할 때 뿌듯했다”며 눈물을 흘렸다.

스물아홉에 결혼해 2년 만에 얻은 외동딸을 엄마는 끼고 살았다. 남들은 유별하게 아이를 챙긴다며 핀잔을 줬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누가 뭐라 해도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내 전부이자 내 행복이었으니까요. 지아가 되레 ‘엄마, 나 시집가면 어떡해’ 걱정해줬지요.” 애지중지 키운 외동딸이 이제 세상에 없다. 2학년 2반에 지아 같은 외동아이만 3명이다.

“다른 세월호 엄마들이 남은 아이를 걱정하면서 ‘걔네들 때문에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말할 때나 ‘엄마 왜 안 오느냐’고 아이 전화를 받는 모습을 보면 부러워요. 저는 전업주부였다가 아이가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산후관리사 일을 시작했어요. 내가 힘들어하면 옆에서 ‘힘내라’고 위로해주곤 했는데….”

지아를 잃은 후 사람들이 ‘산 사람은 이제 살아야지’ 말할 때마다 듣기 싫어서 ‘그런 말 하지 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주변 사람들은 그에게 위로가 되지 않았다. 오로지 허망한 죽음을 같이 겪은 세월호 유가족만이 새끼 잃은 어미의 고통을 이해해줬다. “아이가 죽었다는 말도 듣고 싶지 않아요. 내겐 살아 있는 아이니까요. 유가족들끼리도 그런 말 하지 말자고 했어요.”

아이의 사망 신고는 하지 않았다. 지씨뿐만이 아니다. 유가족 대다수가 아이의 사망 신고를 하지 않았다. “우리 애가 단원고를 졸업할 때까지 벌금을 내더라도 사망 신고를 안 할 거예요. 이미 사망 신고를 한 엄마들이 가족관계증명서를 떼고나면 펑펑 울어요. 사망 신고를 도저히 못 하겠어요.”

인터넷에 유가족에 대한 악플을 볼 때마다 “사람이면 어떻게 저럴 수가 있나” 싶다. 하긴 자기 일도 아니고 TV를 통해 접할 뿐인데 유가족들의 마음을 안다는 게 더 거짓말 같다. 그래도 박근혜 대통령에게는 서운하다. 책임도 안 지고 약속도 안 지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진도체육관에서 대통령이 담화문을 발표할 때 아이들 이름 부르면서 눈물을 흘릴 때만 해도 나도 같이 울고 믿었어요. 언제든 전화하라고, 언제든 만나고 싶으면 오라고 하더니 우리가 밤새 국회에 있으면서 대통령에게 이야기 한 번 들어달라고 애걸복걸했을 때 그냥 지나치시더군요. 너무 섭섭하고 미웠어요.”

세월호 엄마들의 얼굴은 말이 아니다. 여기저기 다니느라 시커멓게 탔고 속병으로 얼굴이 많이 상했다. 오기로, 깡으로 견디는 것일 뿐 제정신으로 견디는 사람은 드물다. “유일한 바람이라면 나중에 지아를 만났을 때 부끄럽지 않은 떳떳한 엄마이고 싶어요. 내가 저세상에 갔을 때 우리 아이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 하나로 버티고 있어요. 실종자 가족들은 아이 뼛조각이라도 찾아서 영결식 치르는 게 소원이예요. 하루빨리 인양해서 배 안에 갇힌 아이들 찾아주세요.” 지씨는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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