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술은 몸의 꽃, 자궁·탯줄은 인류의 근원
“성형과 다이어트로 혼수품화하지 말아야…
생명의 원천인 몸의 언어 회복했으면”

 

최근 대담집 『여자의 몸』을 낸 문정희 시인은 “딸과 아내에서 어머니, 할머니가 되고 생명을 크게 품는 대지모가 되는 것만큼 아름답고 숭고한 삶이 어디 있겠느냐”고 말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최근 대담집 『여자의 몸』을 낸 문정희 시인은 “딸과 아내에서 어머니, 할머니가 되고 생명을 크게 품는 대지모가 되는 것만큼 아름답고 숭고한 삶이 어디 있겠느냐”고 말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윗옷 모두 벗기운 채/ 맨살로 차가운 기계를 끌어안는다/ 찌그러드는 유두 속으로/ 공포가 독한 에테르 냄새로 파고든다/ 패잔병처럼 두 팔을 들고/ 맑은 달 속의 흑점을 찾아/ 유방암 사진을 찍는다’(‘유방’)

여자의 몸에 대해 문정희(68‧한국시인협회장) 시인 만큼 많은 시를 쓴 시인이 있을까. 초기작인 ‘불면’부터 ‘탯줄’ ‘거웃’ ‘나의 자궁’까지 지난 46년간 시를 통해 여자의 몸을 노래해온 그가 최근 대담집 『여자의 몸』(여백)을 냈다.

그는 지난해 11월 일본 조사이국제대에서 일본 시단을 대표하는 여성 시인인 이토 히로미, 시인이자 조사이국제대 이사장인 미즈다 노리코와 함께 ‘여성의 몸’을 주제로 토론회를 열었다. 당시 강연에서 일본군‘위안부’ 할머니의 아픔을 그린 자작시 ‘딸아 미안하다’를 낭송한 그는 힐러리 클린턴 전 미국 국무장관이 위안부를 ‘강제 성노예’(enforced sex slaves)로 표현했다는 말과 함께 “여성의 몸을 성 도구로 여긴 남성 문화의 반성”을 재차 강조했다. 이후 “한국에서도 ‘여자의 몸’에 대한 담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던 차에 출판사의 권유로 유인경 경향신문 기자와 함께 대담집을 냈다.

문 시인이 6월 18일 윈문화포럼 초청을 받아 서울 장충동 반얀트리 서울에서 ‘사랑, 여성, 생명, 내가 만난 최고의 시’를 주제로 강연했다. 그는 거침없이 시원시원하게 국내외 대표 시에 담긴 생명과 사랑의 의미를 역설했다. 여성문화네트워크가 주최하는 윈문화포럼은 여성 문화예술 발전을 위해 만들어진 모임으로 격월로 명사들을 초청해 포럼을 열고 있다. 

진명여고 재학 당시 여고생으로는 처음으로 시집 『꽃숨』을 내놓은 그는 대학 4학년 때인 1969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해 주목을 받았다. 그는 “내 삶을 시로 쓰려는데 남성의 언어밖에 없더라”며 “마치 한국인의 삶을 이야기하는데 한국어가 없어서 영어를 빌려다 쓰는 것 같았다. 그래서 여성의 언어로 시를 썼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 문학의 모태는 생명이다. 자궁을 가진 여성으로 태어난 것은 시인으로서 큰 축복”이라고 말했다.

시인은 여성의 언어로 쓰인 자신의 대표 시로 ‘유방’을 꼽았다. 시집 제목을 ‘유방’으로 하려다가 주변의 만류로 ‘다산의 처녀’로 바꾼 일화도 들려줬다. “서울대에서 각계각층 리더들 50명을 대상으로 강연을 했는데 다음 시집 제목을 ‘유방’으로 붙이려고 한다고 했더니 다들 어이없어 했어요.(웃음) 출판사뿐 아니라 주변의 시인들마저도 ‘그건 좀…’ 하더군요. 유방은 생명과 모성의 근원이고 인류를 키워온 식량고예요. 그런데 유방을 섹스와 결부시켜 손으로 만지고 즐겨온 신체기관으로 여겨온 관습 탓에 드러내기 어색해한 거죠. 사실 유방은 단 한 번도 여성의 것인 적이 없었죠.”

 

문정희 시인은 여성들에게 “거저 생긴 몸이 아닌데 성형과 다이어트를 통해 혼수품화하는 것은 잘못”이라며 “사회가 요구하는 미의 기준에 자신을 끼워 맞추는 노예의 삶을 살지 말라”고 말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문정희 시인은 여성들에게 “거저 생긴 몸이 아닌데 성형과 다이어트를 통해 혼수품화하는 것은 잘못”이라며 “사회가 요구하는 미의 기준에 자신을 끼워 맞추는 노예의 삶을 살지 말라”고 말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젊었을 때 여성은 유방을 레이스 속에 꼭꼭 감춰 싸매곤 마치 수치스러운 과일이 달린 것처럼 부끄러워한다. 사랑에 빠졌을 땐 연인을 즐겁게 하는 포도송이로, 아이를 낳은 다음에는 수유의 역할로 쓰인다. 나이가 들어 유방암 검사 사진을 촬영할 때면 차가운 기계 앞에 패잔병처럼 유방을 올리고 서서 ‘아, 내 몸에 붙어 있는 나구나’라는 자각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시인은 “입술은 몸의 꽃, 자궁과 탯줄은 인류의 근원”이라면서도 “여자의 몸은 성전이자 지옥, 꽃밭이자 폐허”라고 지적했다. 존재의 근원인 에로스로서의 몸, 모성의 성스러움과 굴레뿐 아니라 자본주의 시대의 폭력과 왜곡된 성형 문화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딸과 아내에서 어머니, 할머니가 되고 생명을 크게 품는 대지모가 되는 것만큼 아름답고 숭고한 삶이 어디 있겠느냐며 “생명의 원천인 몸의 언어를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여성들에게 “거저 생긴 몸이 아닌데 성형과 다이어트를 통해 혼수품화하는 것은 잘못”이라며 “사회가 요구하는 미의 기준에 자신을 끼워 맞추는 노예의 삶을 살지 말라”고 일침을 가했다.

그는 이날 강연에서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은 미당 서정주와의 운명 같은 인연도 공개했다. 스승의 대표작 ‘자화상’에 대해 “스물세 살 된 미당이 추석날 밤에 쓴 시”라며 “기운이 빠질 때 미당을 찾아가면 ‘하늘 아래 네가 있도다’는 말로 격려해줬다. 미당이 내게 준 인생의 화두”라고 말했다. 하늘 아래 유일무이한 존재로 그 귀함을 인정해준 것이다. 또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폴란드 시인 비스와바 심보르스카의 ‘두 번은 없다’를 낭송하며 단 한 번밖에 없는 유한한 삶의 소중함을 강조했다.

자작시 ‘한계령을 위한 연가’와 13세기 페르시아 시인 루미의 ‘여인숙’ 등을 잇따라 낭송하는 동안 세미나장에는 시의 향기가 그득했다. “시는 장미처럼 존재하는 매혹 덩어리”라는 시인의 말대로였다. “무기의 언어를 악기의 언어로 바꿔야 한국 사회가 중심을 잃지 않는다”는 게 시인의 마지막 당부였다. 

 

문정희 시인이 18일 서울 장충동 반얀트리 서울에서 열린 제22차 윈문화포럼에서 ‘사랑, 여성, 생명, 내가 만난 최고의 시’를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문정희 시인이 18일 서울 장충동 반얀트리 서울에서 열린 제22차 윈문화포럼에서 ‘사랑, 여성, 생명, 내가 만난 최고의 시’를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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