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채보상운동 이끈 패물폐지부인회 발기인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는 경고아부인동포라 대한매일신보 1907년 3월 8일자.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는 '경고아부인동포라' 대한매일신보 1907년 3월 8일자. ⓒ대구여성가족재단

대구여성가족재단은 우리나라 근대 여성운동의 효시이자 국채보상운동을 이끌었던 남일동 부인 7명의 이름을 찾고 있다.

이들은 “나라 위하는 마음과 백성된 도리에야 어찌 남녀가 다르리오. 듣사오니 국채를 갚으려고 이천만 동포들이 석달간 연초를 아니 먹고 대전(代錢)을 구취한다 하오니, 족히 사람으로 흥감케 할지요 진정에 아름다움이라. 그러하오나 부인은 물론 한다니 대저 여자는 백성이 아니며 화육중일물(化育中一物)이 아니리오”라는 취지문을 발표하고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했다.

취지문은 남성 중심적 참여 방법만을 제시한 것에 대해 지적하며, 남성과 여성이 다르지 않다는 평등사상을 담아내며 각자가 소지한 패물 폐지로 참여할 것을 호소했다. 남일동 7명의 여성은 각자 은지환, 은장도, 은연화 등 총 30g(8돈쭝)의 패물을 내놓았고 이 운동은 전국적으로도 큰 쟁점이 되어 불과 몇 개월 만에 국채보상운동 여성단체 30여 개가 만들어졌다.

국채보상운동에 여성들이 조직적으로 참여한 첫 사례이며, 남성 중심으로 펼쳐지던 운동에 여성과 남성이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진 주체로 인식시킨 단체이기도 했다. 그러나 국채보상운동에서 여성의 역할을 끌어낸 패물폐지부인회의 발기인 이름을 보면 ‘정운갑 모 서씨, 서병규 처 정씨, 정운화 처 김씨, 서학균 처 정씨, 서석균 처 최씨, 서덕균 처 리씨, 김수원 처 배씨’라고 기록돼 있을 뿐이다.

정일선 대구여성가족재단 대표는 “1907년 2월 23일 대구 남일동(현재 진골목)의 부인 7명은 패물폐지부인회를 만들어 국채보상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아직도 이름을 찾지 못하고 누군가의 어머니, 누군가의 아내로만 기억되고 있다”며 “재단에서 국채보상운동의 중요성을 제대로 기억하기 위해 그 여성들의 이름을 찾아주고자 한다”고 설명했다.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1월 29일 대구광문사 부사장 서상돈(1851~1913)이 “우리나라의 국채가 현재 1300만원인데 정부의 국고금으로는 갚을 수 없는 형편이라 국채를 갚지 못하면 장차 토지라도 주어야 할 형편이다. 우리 2000만 동포가 담배를 끊고 그 대금으로 매월 1명당 20전씩 모은다면 3개월 만에 국채를 다 갚을 수 있을 것”이라는 건의서를 제출하면서 시작됐다.

국채보상운동은 담배를 끊는 ‘3개월 단연’을 시작으로 한 남성 중심적 운동이었다. 그러나 남일동 부인회는 취지문을 통해 남성 중심의 운동을 지적하며, 여성의 역할을 강조하고 참여를 호소하여 국채보상운동의 성과를 이끌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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