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신정희 대한하키협회 부회장
남성 중심 체육계어서 차별과 핍박 뛰어넘은 40년
“현실에 안주해 온 체육인들 잘못 커...선배들부터 달라져야”
“하키? 우리나라에 여자 하키팀이 있어?” 신정희(61) 대한하키협회 부회장을 인터뷰한다고 하자 동료 기자가 물었다. 국제무대에서 꾸준히 좋은 성적을 내는 한국 여자하키의 단면이다. 비인기종목 여성 체육인들은 또 다른 차원의 무관심에 익숙하다.
신정희 부회장은 무관심과 냉대 속에서도 체육계와 여성 체육인의 발전을 위해 분투해 왔다. 필드하키 선수 출신인 그는 한국 여성 최초로 필드하키 국제심판, 여자하키 대표팀 코치 등의 자리에 오르며 주목을 받았다. 2006년에는 고양시체육회와 고양시생활체육회 사무국장으로 발탁됐다. 인구 100만 대도시의 체육정책을 총괄하는 대형 조직에서 첫 여성 사무국장이 탄생한 것이다. 이후 2011년 대한하키협회 첫 여성 전무이사, 대한올림픽위원회(KOC) 위원, 대한체육회 선수위원장 등을 거쳤다.
현재 신 부회장은 대한하키협회·아시아하키연맹 부회장, 국민생활체육회 이사 등을 맡아 체육 발전에 앞장서고 있다. 지난 5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파크텔에서 그를 만나 지난 40년간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신 부회장은 수첩에 기록해 둔 자신의 인생 역정을 하나하나 되짚으며 인터뷰에 임했다. 꼼꼼하고 세심하면서도, 여성 체육인이 당면한 문제에 대해 뚜렷하게 소신을 밝히는 그에게서 지도자다운 강한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 여성 체육인으로서는 드물게 40여 년간 선수, 지도자, 행정 분야를 두루 경험했다.
“어느덧 그렇게 됐다. 선수 생활을 함께했던 선배들은 대부분 가정으로 돌아갔는데 저만 40년 이상을 체육 분야에서 일하면서 살았다.”
- 화려한 이력 뒤 고충도 많았을 것 같다.
“1981년 하키 국제심판이 돼 처음 국제무대에 섰을 때 기억이 난다. 다른 여자 심판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체조, 탁구 등 일부 종목을 제외하면 대부분 남성이 심판을 보던 때였으니까. 체육이 남성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시대였다. 여성 코치로 활동할 때도 많이 부담스러웠다. 주변의 인정을 받기도 어려웠고, 지원도 열악했고…. 또 1991년 ‘100인의 여성스포츠회’(여성 체육인들이 여성 체육 지도자 육성과 체육을 통한 복지 증진을 위해 설립한 단체)의 사무국장으로 활동할 때는 ‘여자들이 왜 설치느냐’는 곱지 않은 시선이 쏟아졌죠. 대한체육회조차 냉담한 반응이었다.
더 빈틈없이, 성실하게 일하는 수밖에 없었다. 보통 여성 지도자의 강점이 ‘부드러운 리더십’이라고 한다. 그런데 남자들 속에서 강력한 리더십 없이는 일을 할 수가 없다. 제 얘기다. 일을 할 때는 집중해서 밀어붙이고, 지속적인 발전을 염두에 두고 일을 계속 만드는 스타일이라 부하 직원들이 힘들어하더군요.(웃음)”
-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확대되고 있지만 체육 참여율은 남성에 비해 낮다. 체육지도자, 체육 공공단체 임원 등 여성이 정책 결정에 참여하는 경우는 더욱 드물다.
“70~80년대에 비하면 요즘은 여성들도 갈 곳이 많아졌다. 대한체육회 내 여성 임원이 한두 명에 불과했는데 최근에는 20~30% 수준으로 늘었다. 하지만 한계가 있다. 체육계가 원체 남성 중심적이다. 대한체육회나 체육 공공단체를 보면, 여성 지도자뿐 아니라 여성의 역할 자체를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경쟁도 너무 치열하다. 여성이 남성을 제치고 뛰어난 성과를 보이지 못하면 기용되기 어렵다. 제도적 배려 없이 여성 혼자 힘만으로는 가기 힘든 게 현실이다.”
- 변화를 위해 어떤 노력이 선행돼야 할까.
“선수들의 변화도 중요하지만, 선배들부터 달라져야 한다. 기성 체육인들이 여성 문제에 관심이 별로 없다 보니 여성 체육인 관련 정책 연구·실태조사조차 제대로 안 돼 있다. 우리 선배들이 반성하고, 꾸준히 목소리를 내야 한다. ‘여자들도 잘할 수 있는데 왜 자리를 안 주느냐’고 압박도 하고, 협상도 해서 여성 체육인들의 자리를 더 만들어야 한다.”
-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가 필요한가.
“그동안 체육 지도는 선수의 경기력 향상에만 초점을 맞췄다. 때리면서 가르치는 문화였다. 선수들은 어릴 때부터 똑같은 운동복을 입고 엄격한 규율에 맞춰 생활하고, 기록에만 집중하다 보니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진로를 개척하기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다. 선배들이 돕고 이끌어 줘야 한다. 새로운 지도자는 ‘인권 감수성’이 높아야 한다. 체육도 ‘교육’이니까. 또 개인의 소질과 적성을 파악해 진로 결정에 도움을 주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사회적 역량은 물론, 기본적인 어학능력 등을 키울 수 있도록 이끌 지도자가 필요하다.
물론 후배들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경력단절 위기에 처했다고 웅크리고 있으면 안 된다. 나와서 포럼도 참석하고 사람을 만나 정보도 얻고 스스로 목소리를 내야 한다. 체육인이라고 한우물만 파야 하는 건 아니다. 좁은 체육계에서만 아웅다웅하지 말고 고개를 들어 넓은 세상을 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일반인들과 같은 분야에 도전할 수도 있다. 운동하는 사람들의 근성과 끈기라면 못할 게 없다. 길은 있다. 본인이 나서서 정보를 찾고, 자신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는 게 중요하다.”
- 남성들의 역할도 중요할 것 같다.
“남성과 여성이 함께 가야 한다. 체육계의 발전을 위해서는 남녀 모두의 역할과 참여가 필요하다. 한 쪽의 목소리만을 내세울 수는 없다. 여성들이 남성체육학회 등 단체와 함께 포럼도 열고, 협력과 협상을 해 나가야 한다고 본다. 그 과정에서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여성의 기회와 참여를 늘려가는 게 중요하다.”
- 앞으로의 계획과 포부는.
“후배들의 멘토가 되고 싶다. 후배들이 미로 속 ‘지름길’을 택할 수 있도록, 더 많이 배워서 자신의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돕고 싶다. 체육계 내 여성의 기회와 참여의 폭을 넓힐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낼 계획이다. 여성 대통령도 등장한 시대이지 않나. 능력 있는 여성들이 체육계에 더 많이 진출할 수 있도록 선배로서 제 역할을 해야겠다.
또 은퇴 선수들의 사회진출을 돕기 위한 교육과 멘토링에도 힘쓰려고 한다. 선수들의 ‘인생 2막’을 위한 지원이 아시안게임, 올림픽 출전 선수들에게 투자하는 비용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본다. 장애인 등 소외계층을 보듬는 체육행정에도 힘쓸 계획이다. 어깨가 무겁지만, 한 발짝 한 발짝 나아가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