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툰계·문단 내 성폭력 고발로 시작해

‘#OO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으로 번져

미술·영화·음악·교육계 등으로 확산  

여성들의 성폭력 증언은

“평범한 경험들의 홍수”

 

웹툰, 문단, 미술, 영화, 음악 등 문화·예술계 전반에 걸친 성폭력 고발이 한국사회를 강타했다. 고발의 시작은 웹툰계 내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19일 새벽 A씨는 자신이 미성년자 시절 웹툰작가 이자혜로부터 소개받은 남성에게 지속적으로 성폭행을 당했다고 폭로했다. 이자혜의 ‘미성년자 성폭행 모의·방조’ 논란은 누리꾼들 사이에서 파장을 일으키며 성폭력 고발의 불씨를 당겼다.

이후 트위터에서는 ‘#오타쿠_내_성폭력’이라는 해시태그가 만들어졌고, 문단으로 불길이 옮겨갔다. 21일 오후 B씨는 과거 출판 편집자를 지낸 적이 있다고 밝히며 트위터에 박범신 소설가의 성희롱·성추행을 고발하는 글을 올렸다. 어두운 민낯이 드러난 후 비판의 여론이 거세지자 박 작가는 SNS에 사과문을 올렸고 신작 출간이 보류됐다. 박진성 시인은 문학 지망생들에게 성희롱을 저질러왔다는 것이 밝혀지며 활동 중단을 선언했다.

웹툰, 문단에서 일어난 성폭력 고발은 미술계, 음악계, 교육계 등으로 확산됐고, 여기저기서 피해 생존자들의 목소리가 잇따랐다. 이준규·백상웅·배용제 시인, 함영준 일민미술관 큐레이터, 국립현대미술관 큐레이터 A씨, 한예종, 홍익대 미대 등으로 이어지는 성폭력 고발이 들끓고 있다.

지난 9월 ‘질문 있습니다’라는 글로 한국문단의 여성혐오 실태를 꼬집은 김현 시인은 문단 내에 만연한 성폭력은 결국 ‘여혐’과 연결되는 것이라고 짚었다. 김 시인은 “여성혐오, 여성 대상화라고 하는 것들이 성폭력으로 발현되는 것은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라며 “여성들이 그동안 많은 여성혐오 문제를 겪어 오면서 목소리를 내고 연대해야 한다는 주체적 인식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그런데 이런 성폭력 문제를 문단의 문제로만 여겨서는 안 된다”며 “이는 ‘여혐’이 만연한 한국사회 안에 포함된 일이지, 문화·예술계만이 지니는 특성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예술인이라는 미명하에 잘못됨을 봐주는 분위기, 예술인의 낮은 윤리의식은 성폭력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원인 중 하나다. 김 시인은 “한국사회에선 문학하는 사람에게 면죄부가 주어지는 분위기가 형성돼있다”며 “가해자가 성희롱이나 성추행을 하더라도 그것을 ‘시인의 낭만’ 혹은 ‘문학하는 사람이라면 으레 그럴 수 있는 것’이라고 치부해 용서하는 분위기가 있다”고 말했다.

여성혐오에 대한 저항과 맞물려 시대의 화두가 된 페미니즘은 최근 일어난 상황을 뒷받침해주는 배경이 된다.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의 저자 이민경 작가는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규칙들이 바뀌고 있다”며 “이전까지 여성들은 성폭력을 당해도 2차 가해에 대한 두려움으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그러나 그간 ‘메갈리아’와 소라넷 폐지 등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여성들은 자기의 언어를 찾았고, 문제에 대한 빠른 공론화와 승리를 경험할 수 있었다”며 “이제 더 이상 침묵하지 않아도 된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성폭력도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 작가는 “침묵이 룰인 사회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을 많은 이들이 깨닫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성폭력 고발 운동으로 실상이 드러난 각종 성범죄 사건들은 한국사회 내 뿌리 깊은 강간문화(rape culture)와도 연관된다. “너는 OO번째 은교” “여자는 남자 맛을 알아야 해” “가슴 만져 봐도 돼?” 등 성희롱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일삼고, 성추행을 친근함의 표현이라 생각하는 것은 모두 강간문화를 토대로 벌어진 행위들이다. 미디어에서 성폭력을 로맨스로 재현하기, ‘남자다움’을 성적으로 폭력적·지배적인 것으로 정의하기, ‘여성스러움’을 순종적이고 성에 소극적인 것으로 정의내리기 등은 모두 강간문화에 속한다.

허민숙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연구교수는 이번 성폭력 고발 사태를 “우리사회가 그동안 (남성들의) 성적인 추근댐을 얼마나 가볍게 여기고 부추기며 용인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말했다. 허 교수는 “증언들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사회에서 여성들이 겪는 성폭력은 굉장히 평범한 경험”이라며 “술자리나 사석에서 일어나는 성희롱, 음담패설, 불필요한 신체적 접촉 등은 강간이 쉽게 일어날 수 있게 만드는 배경이 된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여성들은 지난 5·17 강남역 살인사건을 통해 ‘내가 피해자가 될 수 있었다’는 자각을 통해 분노와 공포를 경험했다”며 “남성들이 보기엔 사소하고 장난처럼 보이는 것들이 사실은 여성을 함부로 대하고 심하면 살인까지 이를 수 있는 여성혐오 문화의 시작”이라고 꼬집었다.

가부장제 사회 속에서 날이 갈수록 견고해지는 강간문화와 여성혐오에 여성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며 저항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SNS를 통한 성폭력 고발, 해시태그 운동 등 활발하게 전개되는 일련의 상황들은 그동안 억눌려왔던 여성들의 분노로 읽힌다. 일상 속 만연한 성폭력에 저항하는 물결은 해외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지난 6월 해외 SNS에서는 #NoWomanEver(이제껏 그런 여자는 없었다) 해시태그 운동이 확산되며 화제가 됐다. “낯선 남자가 날 따라오면서 ‘집에 데려다줄게’라고 했다. 날 정말 걱정 해주나봐!” 등 길거리에서 겪은 성희롱·성추행 경험을 반어적으로 표현해 꼬집는 형태다. 한 트위터 이용자가 올린 트윗에서 시작해 여성들은 본인이 경험한 성차별과 성폭력을 털어놓았고, 여성혐오에 대한 인식을 일깨웠다.

이번 성폭력 고발 운동을 “아프지만 좋은 사인(sign), 불편하지만 필요한 것”이라 말한 허 교수는 우리사회가 앞으로 이 상황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에 대해서도 짚었다. 그는 “가해자들이 수치심을 느끼게 만들고, 이 사건이 법정으로 갔을 때 응당한 처벌을 내려 국가가 맹렬하게 비난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며 “그 과정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켜 나가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또다시 피해자에게 책임을 묻는 일이 벌어진다면 우리사회는 이 상태에서 퇴보하게 될 것”이라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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