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혜진/'운동사회내 가부장성과 권위주의 철폐를 위한 여성활동가 모임'

얼마 전 대학후배와의 술자리에서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지금으로서도 그 눈물에 대한 정의를 분명히 할 수가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지금 흘리는 이 눈물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을 수없이 했다는 기억뿐이다.

1994년 여름 서울지하철노동자들의 총파업 당시, 가장 정례화된 학생회 사업인 농활마저도 뒤로 미룬 채, ‘궤도농활’이라 칭하며 노동자들과 연대의 힘을 다하였던 학생들 틈에는 나도 있었고 그 후배도 있었다. 후배는 당시 수배중이었던 한 지하철노조 간부가 “여자와 함께 다녀야 경찰의 검문을 피할 수 있다”는 말에, 당시 누가 들었을지라도 의당 수락했어야 할 그 구체적인 ‘총파업 엄호투쟁’에 따라나섰다.

“다녀올게”라는 단 한마디 남긴 것이 전부였다지만, 그리고 이미 농촌으로 내려가 농활을 수행한 지 수일이 지났지만 그 후배가 성폭력 피해자로 돌아올 것으로 상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고백하건대, 나를 포함한 그녀의 선배들은 사실상 그녀를 위해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고, 할 수 없었다. ‘성폭력 사건의 공론화가 현재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한 공격의 빌미가 될 것’이라는 암묵적인 합의는 매우 두터운 이데올로기였다.

사정을 모르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삐딱해질 대로 삐딱해 보이는 이 ‘피해자’의 주사 섞인 눈물에 눈물을 더하는 것만이 내가 행한 유일한 위로였다. 후배의 눈물에는 운동에 대한 적대적인 회의와 못나게 군 선배들에 대한 원망이 뒤섞여 있었고, 그 즈음 또한 성폭력 피해자였던 나는 자기모멸감에 시달렸었다.

후배를 성폭행했던 가해자가 96년 또 다른 공간에서 성폭력을 저질렀고, 이 사건의 피해자들이 공동대응을 하자며 나에게 연락을 해왔을 때, 나는 2년간의 시간 공백이 결코 긴 시간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적어도 성폭력 피해자에게는. 나는 대리인을 자처하며 당시 운동을 그만둔 후배를 만났고, 후배는 이제 와서 또다시 상처를 건드린 나에게 독설을 퍼부었다. 96년도 역시 운동사회의 남성중심적 보호주의와 운동적 대의로 물타기 된 미온적 사건 해결에 대해 후배에게는 보고조차 못했고, 우리들은 그렇게 서로의 상처를 부여잡고 고립되었다.

그리고 얼마전 바로 그 후배를 만났다. 6년이 지난 이제와서야 그 가해자의 이름을 듣고도 가슴이 울렁거리지 않게 되었노라고, 나에게 독설을 퍼부은 것이 더한 상처가 되었노라며 그녀는 울었다. 이번에도 그녀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서럽다고도 말하지 못할 눈물을 더하는 것뿐이었다.

‘운동사회 성폭력 뿌리뽑기 100인 여성위원회(가칭)’가 그 동안 은폐되어 있던 성폭력 가해자를 실명공개하겠다고 나서자 별의별 반응이 쏟아지고 있다.

공개 대상자들의 명단을 미리 확인하기 위해 다양한 인맥을 통해 100인위 멤버들에게 접촉을 시도하는 노조간부가 있는가 하면, 자기 동료가 리스트에 포함되어 있는지 여부를 확인해 주면 다른 대상을 제보하겠다는 단체활동가도 있었다. 또 최근 노기연(노동조합기업경영연구소)의 김상복 이사는 공개자 명단에 있다는(노기연 관련자를 포함한) 4명의 실명을 직접 거론하며 그 사업이 강행되는 한 사퇴하겠다며 같은 단체 소속의 100인위 여성활동가를 협박하기까지 했다. 물론 현재까지 100인위원회는 성폭력 가해자 실명공개를 위한 방식, 발표 시기, 그리고 대상을 공식화한 바 없다.

도대체 당신들이 이토록 두려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