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레즈비언이 아닌 엘렌, 연기자일 뿐

두꺼운 역사책을 뒤적거리지 않아도, 신문의 해외토픽란을 정독하지 않아도 성적소수자를 향한 억압과 통제는 전지구적으로 끊임없이 자행되어 왔던 견고한 시스템입니다. 오늘 소개할 엘렌 드제너러스 역시 그러한 시스템 속에서 비난과 환호를 한 몸에 받은 연기자입니다.

아마 여러분이 엘렌 드제너러스라는 이름을 들어보셨다면 대부분의 출처는 스포츠 신문의 가십란이었을 것입니다. 할리우드의 여배우 앤 헤이시의 연인으로서 지면을 장식하였으니까요. 연기자로서 엘렌 드제너러스의 재능과 경력보다는 누군가의 연인 -그것도 동성의 연인이라는 토픽이 마초 신문에게 더없이 달달한 기사거리임에 틀림없겠지요. 하지만 엘렌의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 자극적인 기사 몇 줄보다는 두꺼운 단행본이 더 어울릴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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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렌 드제너러스가 웃음의 재능을 발견하게 된 시기는 부모가 헤어진 즈음입니다. 파경으로 힘들어하는 어머니를 위하여 만담과 퍼포먼스를 펼치면서 미래를 위한 재능을 차곡차곡 쌓아간 것이지요. 그 덕분에 엘렌과 그의 어머니 사이의 우정은 훈훈한 미담으로 대중에게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엘렌의 희극적인 면모는 그저 웃기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바텐더, 웨이트리스에서부터 세일즈우먼, 페인트공, 굴 따는 일까지 경험한 그의 인생역정은 엘렌의 코미디 연기에 현실감각을 불어넣습니다. 그런 엘렌이 넓은 세상으로 한 발자욱 나오게 된 계기는 미국의 유명한 토크쇼 <투나잇쇼>에 고정 패널로 출연하게 되면서부터입니다. 그 후 다양한 코미디쇼와 드라마에서 발군의 실력을 선보이며, 1994년 엘렌 드제너러스를 전세계에 알리게 된 ‘엘렌’ 시리즈를 시작하게 됩니다.

ABC TV의 시트콤 <엘렌>에서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주인공에서부터 제작과 극본까지 맡으며 자신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로스엔젤레스의 서점을 배경으로 다채로운 인간군상을 담은 이 드라마는 전국적인 인기를 누리게 되며, 상업적으로도 성공을 거두지요. 하지만 그 유명한 ‘커밍 아웃’ 에피소드가 방송되면서 엘렌의 인생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합니다. ‘커밍 아웃’이라는 말 그대로 그는 드라마 <엘렌>을 통하여 주인공 ‘엘렌’과 그 자신 ‘엘렌’의 성적지향을 세상에 공개하게 된 것이지요. 그럼으로써 엘렌 드제너러스는 미국 공중파 방송 최초로 동성애자를 연기한 주인공으로 기록됩니다.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밝힌 드라마 ‘엘렌’에 대한 반응은 그야말로 폭발적이었습니다. 엘렌이 소개되지도 않은 한국에서도 보도가 되었을 정도이니 어련할까요. 물론 대중의 열광적인 지지와 호응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편견과 질타의 공세가 더욱 드셌지요. <엘렌>의 유력한 광고주들은 자사의 광고방송을 철회하였고, 미국의 몇몇 주에서는 드라마 방송을 제한하였습니다. 더불어 그의 연인으로 알려진 영화배우 앤 헤이시도 호모포비아의 만행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영화제작사는 앤 헤이시의 캐스팅을 재검토하였고, 앤 헤이시의 손에는 백지화된 계약서가 쥐어졌을 뿐이었습니다. 물론 드라마 <엘렌>은 결국 막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보수진영의 파상공격에도 불구하고 엘렌 드제너러스의 활동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책을 출간하기도 했고, <미스터 러버>와 <생방송 에드 TV> 등의 영화에서 엘렌의 변함없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지요. 물론 다양한 인권 모임에 참가하여 자신의 신념을 밝히는 일 역시 그의 보람이기도 합니다. 최근에는 3편의 옴니버스로 꾸며진 영화 <더 월2>에 샤론 스톤과 함께 출연하여 레즈비언 부부의 삶을 연기하였습니다. 감독은 엘렌의 동반자인 앤 헤이시가 맡았다고 합니다. 자신들의 삶으로부터 끌어올린 이야기이기에 그 진솔함은 더할 것만 같습니다. 어쨌든 보수의 칼날이 드세기만 한 섹슈얼리티라는 장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환기시키며 투쟁하고 있는 엘렌의 활약을 기대해 보겠습니다.

TV 시트콤 <엘렌>의 한 대목이 떠오릅니다. 커밍 아웃을 감행한 엘렌에게 한 친구가 묻습니다. “우리가 널 어떻게 불러야 해? 게이? 아니면 레즈비언?” 엘렌은 대답합니다. “그냥 엘렌이라 불러줘”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삐딱한 색안경 없이 자신 있게 엘렌이라 부를 준비가 되셨는지요.

김이 혁상 객원기자WEIRDO@cholli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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