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다 싶게 읽을 만화가 없을 때 성인만화 코너를 기웃거려 본다. 그러나 살짝 꺼내 대강 훑어만 봐도 묘한 체위의 여체와 피 튀는 잉크자국이 수두룩한 걸 확인하는 순간, 읽을 마음이 싹 사라진다. 남성 편중적인 스토리 전개나 폭력, 강간 같은 소재는 아무리 성인이라도 여성이 즐기기엔 무리가 있다. 그렇다면 남성이 이런 만화를 즐기는 데엔 그럴만한 이유라도 있다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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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회를 치루던 공예가 류타 요우란 남자가 비밀폭력조직 ‘백팔룡’의 싸움에 휘말려 초절정의 살인기를 전수 받고, 최면에 걸린 채 조직의 킬러로 활동한다. 그는 조직에 속해 있지 않은 프리랜서 킬러의 신분이라는 점과 원치 않는 살생을 한 후 눈물을 흘린다 하여 ‘크라잉 프리맨’이라 불린다.

코이케 카즈오, 이케가미 료이치 콤비의 <크라잉 프리맨>(도서출판 대원)은 성인물의 대표작으로 장르의 특성을 ‘제대로 살린’ 만화로 꼽힌다. 우리 나라에서는 10년 이상 해적판으로 떠돌며 명성을 쌓았고 할리우드에서는 영화까지 만들어졌으니 재미와 인기는 짐작할만 하다. 최근 라이센스로 정식 출간 되자, 기자들은 이 만화를 "성인만화 답지 않게 깊이 있는 스토리와 섬세한 그림으로 완성된 성인만화의 걸작’이라고 소개했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엔 사실적인 묘사가 돋보이는 그림만 보기 좋을 뿐, 우연이 난무하는 전형적인 스토리가 여타의 B급 액션물과 별반 다르지 않아보였다.

솔직히 이 만화의 인기요인은 ‘완성도’보다는 주인공에게 있는 게 아닐까. 그는 남성 독자들에게 대리만족을 안겨줄 모든 요소(무술=힘, 순정을 다 바치겠다는 아름다운 여인들, 멋진 외모, 인간미)를 갖추고 ‘밤의 세계’에 우뚝 선 인물이다. 그를 통해 ‘낮의 세계’인 현실의 삶에서 눌리고 내몰린 남성 독자들이 열등감을 잊고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추앙 받아 마땅한 이 완벽한 주인공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보통 남자들보다 훨씬 불행한 존재다. 그의 이름을 물어, 그가 왜 우는지(크라잉), 정말 자유로운지(프리맨)를 생각해보자. 그는 최면에 걸려 범죄에 이용당하면서도 암흑 조직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사랑하는 여인마저 제 손으로 죽이고 울어야 하는 ‘팔자 더러운’ 남자다. 생활도 사랑도 정상적일 수 없는 이런 남자의 처지가 뭐가 그렇게 부러운 것일까?

‘진짜 사나이 다운 멋진 삶’이라고 감상을 밝힌 독자에게 ‘이렇게 살라고 하면 살겠느냐?’고 물으면 ‘그렇다’는 대답이 나올까? 설마. 그저 현란한 무술 씬에 스트레스가 풀리는 거겠지, 옷을 벗어 젖히는 여자 그림에 눈이 즐거운 거겠지. 그렇게 믿고 싶을 뿐이다.

이미선 객원기자 ogocici@cholli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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