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이슈 관련 용어엔 재빨리 대응하지만

유독 젠더 관련 단어엔 폐쇄적인 국립국어원

페미니즘 이해도 높아지면서 정확성 요구 늘어

국립국어원은 대중 의견 받아들여 뜻 바꿔야

 

국립국어원은 페미니스트에 대해 ‘① 페미니즘을 따르거나 주장하는 사람 ② 여자에게 친절한 남자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정의한다. ⓒ여성신문
국립국어원은 페미니스트에 대해 ‘① 페미니즘을 따르거나 주장하는 사람 ② 여자에게 친절한 남자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정의한다. ⓒ여성신문

“페미니스트가 ‘여자에게 친절한 남자’라고?” 지난해부터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고 관력 서적을 읽으며 공부해온 직장인 김소희(24·가명)씨는 최근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를 인터넷에 검색해본 후 깜짝 놀랐다. 국립국어원이 페미니스트를 ‘여자에게 친절한 남자’라고 정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씨는 “여자에게 친절한 남자가 페미니스트라니, 뜻풀이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국어원 정의에 따르면 ‘여자는 약한 존재니까 남자가 보호해줘야지!’라며 여성의 주체성을 지우고 친절을 베푸는 남자도 페미니스트로 봐야 하는 것이냐”라고 꼬집었다.

‘여자에게 친절한 남자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은 국립국어원이 표준국어대사전에 명시한 페미니스트의 두 번째 뜻풀이다. 페미니스트에 대한 정의 논란은 지난 2015년 1월부터 시작됐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이하 여성연합)은 1월 ‘페미니스트’와 ‘페미니즘’ 정의 수정을 요청한 바 있다. 이슬람국가(IS)에 가담한 것으로 알려진 김모군이 당시 SNS에 ‘페미니스트가 싫다’는 글을 올려 이슈가 되던 때다. 국어원은 페미니스트를 본래 ‘①여권 신장 또는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사람 ②여성을 숭배하는 사람. 또는 여자에게 친절한 남자’로 풀이했었다. 여성연합은 “페미니스트에 대한 오인과 몰이해를 강화한다”며 정의 개정을 요구했다.

국어원은 표준국어대사전 정보보완심의위원회 회의를 거친 후 같은 해 6월, 뜻을 개정해 올렸다. 하지만 바뀐 정의는 이전과 다를 바 없어 논란을 키웠다. ‘① 페미니즘을 따르거나 주장하는 사람 ② 여자에게 친절한 남자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 수정된 내용이다.

개정 이후 거센 비판이 일자 국어원 관계자는 “실제 우리 사회에는 ‘페미니스트는 여자에게 친절한 남자’라는 용례가 있다”며 “사전이 정확한 의미를 풀이할 수도 있지만 언어에 관한 정보도 남겨둬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해명했다. 하지만 국어원은 1970~80년대 신문기사에 쓰인 일부 용례만 제시했을 뿐 정의에 대한 제대로 된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여성연합은 당시 논평을 통해 “국어원의 낮은 성평등 의식에 심각한 우려를 표한다. ‘여자에게 친절한 남자’는 성차별 해소와 성평등 사회 실현을 실천하는 사람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며 “국어의 성차별을 불식시켜야 할 국어원이 잘못된 의미를 그대로 두어서 되느냐”고 지적했다.

개정된 페미니스트 정의를 본 후 누리꾼들의 비판도 거셌다. “일베에선 남자 페미니스트 보고 ‘보빨러’(여성차별·혐오를 비판하는 남성들을 비하·폄하하는 말)라고 하던데. 국립국어원이 같은 말을 온건하게 적어놨네요.” “국립국어원은 페미니즘(페미니스트)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고 그걸 표준국어대사전에 그대로 반영하는 게 틀림없다.”

양이현경 한국여성단체연합 정책실장은 “여성주의는 계속 변화하고 시대에 따라 정의가 바뀌기 때문에 변화에 발맞춰 그때그때 용례를 추가해 넣는 게 더 낫다”고 밝혔다. 양이 실장은 “특히 지난해에는 한국사회를 중심으로 페미니즘 담론이 부상하면서 페미니즘에 대한 대중들의 이해도가 높아졌고, 페미니스트 뜻풀이의 정확성도 요구되고 있다”며 “국어원은 대중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페미니스트 뜻을 바꿔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국어원은 재작년과 다를 바 없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박선영 국립국어원 언어정보과 연구원은 “실제로 페미니스트 뜻풀이에 대한 문제제기와 민원이 많이 들어오고 있어 국어원 측에서는 부담이 된다”면서도 “표준국어대사전에 명시된 표제어나 뜻풀이는 명백하게 틀리지 않은 이상 삭제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또 “사전인 만큼 당시 단어가 쓰인 시대의 단면을 보여줘야 한다고 주장하는 위원들이 아직은 더 많다”고 덧붙였다.

최정도 국립국어원 언어정보과 연구사는 “당시 페미니스트가 공처가, 애처가 정도로 쓰인 적이 있어 과거 문헌을 읽을 때 참고하라는 차원에서 두 번째 의미를 제시해놓은 것”이라고 밝혔다. 특히 그는 “페미니스트가 첫 번째 뜻풀이(페미니즘을 따르거나 주장하는 사람)로 99% 이상 쓰이는 건 국어원 측도 알고 있다”며 “1번 의미를 페미니스트의 주된 뜻으로 이해하고, 두 번째 뜻풀이는 과거에 그렇게 쓰인 바가 있다는 것으로 참고해주시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권명아 동아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이에 대해 “국어원이 사회·세대이슈 관련 용어에는 발 빠르게 대응하지만 유독 젠더별 관련 단어에는 개방성을 보이지 않는 듯하다”고 짚었다. 실제 국어원에서는 우리말샘을 통해 ‘흙수저’나 ‘헬조선’ ‘삼포세대’ 등 사회변화 속에서 생겨난 신조어와 의미를 함께 수록하고 있다.

권 교수는 “페미니스트를 ‘여자에게 친절한 남자를 비유하는 말’로 풀이한 건 일단 사전정의로 맞지 않는 것”이라며 “페미니스트가 외래어인 만큼 외국에서는 어떤 의미로 정의되고 있는지를 먼저 살펴보고, 그 뜻을 참고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설명했다. 한국적 맥락에서 잘못 쓰인 의미를 사전정의로 싣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지적이다.

현재 케임브리지 사전에서는 페미니스트를 “페미니즘을 옹호하고 여성들의 평등한 기회와 대우를 위해 변화를 만들고자 하는 사람”으로 정의하고 있다. 옥스퍼드 사전은 페미니즘을 “성평등을 바탕으로 하는 여성의 권리지지”로 풀이한다.

권 교수는 “페미니즘 담론을 통해 언어 권력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면서 많은 이들이 언어나 단어 정의에 민감도를 갖게 됐다”며 “언어를 가장 예민하게 다뤄야 할 기관이 다소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닌가”라고 분석했다. 이어 그는 “아무리 국어원에서 제정한 표준 정의라 할지라도 언중들이 그 뜻을 받아들여주지 않으면 무의미해질 수밖에 없다”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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