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 탄실의 시대와 슬픔

불우한 삶과 쓸쓸한 죽음을

기억하고 위로하는 소설

 

생명의 근원에서 불러낸 어머니

“어머니와 고향과 모국어와

문학은 하나였다” 깊은 깨달음

 

초저녁 잠버릇이 있는 내가 새벽 1시가 넘은 시간에 김별아의 장편소설 『탄실』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었다. 그러나 이내 머리 밑으로 밀쳐놓았던 책을 다시 집어 들고 책장을 열었다. 작품의 뒷면에 배치한 작가의 말 끝 부분 몇 문장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아서였다.

“생물학적 동일성을 넘어 경험과 가치의 공유자로서 그녀의 불안과 우울과 절망을 이해하기에, 우리는 여전히 ‘여성’작가로 살아 있다. 부족한 후배의 졸고로나마 탄실 김명순의 불우한 삶과 쓸쓸한 죽음을 기억하고 위로할 수 있다면 다행이겠다.”

왜 이 문장이 독자인 나의 내면에 들어와 떠나지 않았을까. 이유는 단순했다. 소설의 주인공 탄실 김명순은 실존 소설가였고, 그를 소재로 삼아 소설을 쓴 김별아와 독자인 이경자가 ‘여성작가’다. 그러나 김명순 소설가가 살아낸 시대는 일제 식민지에, 봉건적 신분제와 남존여비의 풍속이 오랜 문화적 전통으로 사회질서와 가치를 결정하던 때였다.

탄실은 그런 시대에 퇴기 출신의 첩실에게서 딸로 태어났다. 퇴기에 첩실이면 그것만으로 이미 어떤 삶을 살게 될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정직하지도 않고 진실하지도 않고 타인에 대한 존중감도 없는 남자에게 강간당하고 그것을 사랑이라 믿은 김명순. 이 사건은 김명순의 평생을 따라붙는 모욕과 능멸의 꼬리표가 됐다. 식민지 시대의 지식인 남성들의 감상주의는 사뭇 폭력적이다. 천성이 순수하고 진실한 김명순은 영리하게 처세하지 못해 그가 원하는 사랑이나 사랑이라고 붙잡은 관계는 모욕으로 끝난다.

김별아 소설가는 김명순의 삶이 나락으로 빠져드는 과정을 뜨겁게 복원해냈다. 그 시대의 풍물과 풍속과 지식인들의 위선과 폭력성의 내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해서 읽는 동안 내내 그 시대를 사는 기분을 느끼게 했다.

천진한 천성을 지닌 김명순이 고향 평양을 떠나 경성과 동경과 교토에서 다시 경성으로 그리고 다시 동경으로 떠나 마침내 정신병자로 세상을 떠나게 되는…. 인생 역정에 돈과 남자와 문학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로부터 마침내 김명순이 다다른 구원의 등대일 정신세계는 여자가 지닌 모성성이다. 오래도록 자신의 생에 멍에처럼 걸렸던 이름표, 기생 딸년, 첩년의 딸 소리가 싫어서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조차 꺼렸던 어머니를 자기 생명의 근원에서 불러냈을 때 김명순은 어머니와 고향과 모국어와 문학이 하나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이미 마흔이 넘은 그 여자 김명순은 동경의 술집 거리에서 땅콩이나 잡화를 들고 다니며 팔던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다. 이런 용기와 힘을 준 건 자신이 글로 시대에 부역하거나 복수하지 않았다는 자긍심, 자존감이었다.

김명순은 어머니가 되고 싶은 비현실적인 갈망에 사무칠 때 운명처럼 이름도 없는 고아 하나를 만난다. 그 아이의 이름을 시몬이라 지어준다.

“시몬을 만나고서야 깨달았다. 아슴아슴하게, 간질간질하게, 그때 가슴 밑바닥에서 반짝이던 것의 정체를. 그것은 바로 잃어버리거나 빼앗긴 줄 알았던 모성의 빛이었다.”

 

김별아 소설가
김별아 소설가

다시 한 번 김별아 소설가의 작품 의도를 보자.

“탄실 김명순은 오해라는 허울의 폭력 속에서 허우적대며 생의 가장 빛나는 계절을 흘려보냈다. 학문을 통해 스스로를 드높이려는 명예심은 어머니가 기생이었다는 사실만으로 조롱당했고, 잔인한 성폭행 피해자이면서도 방종한 여자로 취급되었다. 인간으로서 사랑받고자 하는 열망조차 백안시됐기에 당대에는 스캔들 메이커로, 후대에는 자유연애주의자이거나 연애지상주의자로 낙인찍혔다. 그리하여 나의 작업은 김명순에게 내리 찍힌 불도장을 지우고 오롯한 작가이자 인간으로서의 그녀를 회복하려는 의도로부터 시작되었다.”

김별아는 신라의 ‘미실’로부터 시작해 근현대의 타락하고 퇴폐적인 시대정신으로 살해당한 소설가 ‘김명순’에 이르기까지 주목해야 할 여성들을 문학으로 복원해 내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그 작업의 오늘, 우리 앞에 놓인 결과인 『탄실』이 사랑받기를 바란다. 우리가 살아내지 않았던 시대를 복원해 낸 능력과 수고가 무시당하지 않기를, 선배소설가 독자로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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