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 주도 관객층은 여성

창작과 생산에선 여성 소외

남성 중심 서사에 중독된

한국 영화판 다양성 사라져

 

 

 

솔직히 고백하자면 한국 상업 영화를 안 본 지 꽤 됐다. 물론 영화인으로서 이런 말을 한다는 건 결코 자랑이 아니다. 부끄럽고 속상한 일이다. 하지만 최근 몇 년 동안 한국 영화는 몇몇 작품을 빼고는 정말이지 볼 영화가 없었다. 무엇보다 정말 많이, 많이, 불편했다. 

작금의 한국 영화는 남자들의 세상을 끊임없이 변주하고 재생산한다. 오직 남성 중심 서사다. 고독한 킬러가 주인공이거나 군경검찰이 무대인 스릴러이거나 사내 둘이 남자의 의리를 펼치는 브로맨스 아니면 남자 떼거지가 나오는 액션 활극이던 간에 결국 시대 불문 세상은 남자의 월급과 페니스로 즉 남성 권력으로 돌아간다는 시나리오다. 한마디로 남자 패거리들의 세상이다. 그 나물에 그 밥. 포스터만 봐도 등장인물 숫자에 차이가 있을 뿐 전부 수컷의 서사라는 점에서 하나같이 똑같다. 그런데 배우만 바뀐 엇비슷한 이런 영화가 500만을 넘고 1000만을 넘는다. 그리고 오늘도 나는 포스터에 두 남자 주인공이 마주 보는 영화가 오백만을 넘어 흥행몰이하고 있다는 기사를 읽었다.

리서치 조사회사 한국 갤럽이 2017년 11월8일부터 28일까지 3주간 전국에서 만 13세 이상 남녀 1700여 명을 대상으로 ‘2017년 올해를 빛낸 영화배우는?’이라는 설문 조사를 했다. 1위부터 10위가 모두 남성, 남배우다. 여성은 20위권에 김혜수 전지현 나문희 이렇게 달랑 3명이 포함되어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극장에 가는 주 관객층은 세대 불문 절대다수가 여성이다. 예를 들어 2015년 CGV 리서치 센터에서 그간 4년간 개봉했던 영화 중 범죄와 폭력이 소재인 19금 범죄영화 9편을 분석했다. 결과는 2030 여성 관객 비중이 47%. 액션 느와르는 남자들이 선호하므로 남성 관객이 더 많이 볼 것이라는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여자들은 로맨스물이나 드라마를 주로 본다’는 말은 고정관념에 불과하다는 소리다. 여성들은 장르와 관계없이 고르게 다 본다. 즉 티켓파워는 우먼파워가 확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크린 속 여성 주인공은 눈을 씻고 봐도 찾기 어렵다. 다들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 세상에는 남성만 사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절반은 여성이다. 그러나 한국 영화에는 그 반인 여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여성이 전면에 등장하지 않는 한국 영화. 여성의 삶이 부재하고 여성의 목소리가 지워진 한국 영화. 남성들만의 대한민국, 그들만의 리그가 세상의 전부라고 이야기하는 한국 영화. 따라서 이에 의문을 품지 않는다는 것은 어찌 보면 더욱 이상한 일이 아닌가?

영화뿐만이 아니라 음악, 공연 등 대중문화 전반을 주도하는 관객층은 여성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트렌드와 소비라는 분야에 국한되어 있을 뿐, 정작 창작과 생산에서 여성은 점점 더 소외되고 있다. 영화계에서 제작자 투자자뿐만이 아니라 영화감독의 절대다수는 이성애자 비장애인 남성이다. 즉, 최종 결정권은 여전히 남성들의 전유물이다. 이와 같은 남성 중심적인 권력 구조에서 여성은 너무도 당연하게(?) 감독이 아니라 ‘여성’감독, 배우가 아니라 ‘여’배우로만 규정, 소환된다. 

성차별은 영화판에서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그리고 차별이 일상화된 공간에서는 혐오는 익숙한 클리쉐가 되는 법이다. 한국 영화는 맥락 없는 과도한 폭력과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가학적인 성묘사를 당연시한다. 그중 여성 혐오는 이제 하나의 경향이자 한국영화의 특색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 정도다. 그러나 만일 한국 사회의 비인간성에 경종을 울리고 주인공의 잔혹함을 묘사하기 위해 ‘여성’을 발가벗겨 폭행하고 성적으로 모욕하는 장면을 넣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영화감독이 있다면 그는 창작자의 자유니 예술을 검열한다고 핏대를 세울 자격이 없다. 이는 빈곤한 상상력을 감추기 위한 게으른 변명에 불과하다. 감독의 조악한 세계관, 영화적 시선의 부재, 예술가로서의 감수성 결핍, 곧 연출자로서의 나태함 탓이다.

생태계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종의 다양성이 필수불가결하다. 그런데 다양성은 자연생태계에만 필요한 게 아니다. 한국 영화는 더 이상 새로운 모험도 실험도 도전도 하지 않는다. 심하게 말하면 지금 한국 영화는 과도하게 발기 상태에 있는 남근 포르노그래피일 뿐이다. 한국 영화에는 여성만 사라진 게 아니다. 남배우가 주인공인 남성 중심 서사만 반복되는 한국 영화에는 다양성마저 사라졌다. 그런 뜻에서 한국 영화의 생태계는 위험수위에 이르렀다. 망가져 가는 생태계를 살리기 위해서 무엇보다 충무로를 장악하고 있는 남성 권력 즉 남성 중심 서사에 중독된 영화인들 스스로 반성과 성찰이 필요한 때다.  

홍재희 독립영화감독, 작가. 영화 ‘먼지’, ‘암사자(들)’ 연출. 다큐멘터리 ‘아버지의 이메일’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냈다. 2017년 책 『그건 혐오에요』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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