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순경/이화여대 여성학과 교수

이미 두 차례의 전쟁에서 남편과 아들을 잃은 카불의 파리다는 아이들을 먹이기 위해 오늘도 곰팡이 핀 빵 조각을 갈며 아침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카불 상공의 폭탄이 자신과 아이에게 떨어질 수 있다는 생각은 해도 미군이 떨어뜨리는 식량이 자신과 아이의 굶주림을 없애줄 것이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는다.

군사 공격의 가장 큰 피해자는 빈 라덴이 아니라 남편을 잃은 200만의 아프간 여성과 부모를 잃은 50만의 전쟁고아와 불구자들이라는 것을 아는 데에는 어떠한 지식도 필요하지 않다. 또 빈 라덴을 잡기 위해 초음속 스텔스기와 토마호크, 차세대 고공 첩보기 글로벌호크, JDAM탄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데에도 별다른 지식이 필요하지 않다.

우리 주변에 널려있는 여러 정보들을 기초로 조금만 생각한다면, 우리는 보복 전쟁이, 그리고 그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많은 말들이 그 자체로 얼마나 폭력적인지, 그 자체로 얼마나 심각한 테러인지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세계의 ‘지도자’들은 이러한 국가에 의한 조직적 폭력이 “정의로운 미국의 용감한 행동”이며(이스라엘 수상), “복수가 아니라 테러라는 악에 대한 정의”이며(블레어 영국 수상), “정당한 것”(김대중 대통령)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촘스키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렇게 많이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그렇게 모를 수 있을까. 미국 사람들은 부시의 보복 공격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 수 있도록 하는 수없이 많은 정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것이 테러를 근절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이러한 무지에의 의지는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이 아침에, ‘절대 악’은 사유가 없는 자리에서 자란다는 한나 아렌트의 말이 새삼스레 떠 오른다. 아렌트의 결론은, ‘철저한 악’은 그 실체가 없다는 것. 왜냐하면 그 ‘악’은 아둔함, 생각하지 않음에 기초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하는 일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는 것인지에 대해 생각지 않고 행하기 때문에. 자신은 ‘명령대로 한 것뿐’이라는 나치 전범의 재판과정을 보면서 아렌트는 ‘악의 일상성’에 대해 생각했던 것이다.

부시의 전쟁을 지지하는 수많은 미국인들 가운데 그들의 지지가 아프간의 사람들에게 어떠한 공포와 고통을 가져다주는지에 대해 잠시라도 생각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지금 미식 축구에 열광하고 있는 수십, 수백만의 미국인들 가운데 그것을 생각해 본 사람들은 몇 명이나 될까. 보복 전쟁 지지율 90% 이상의 신화는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악에 기초한 체제는 그 실체가 없는 만큼 허약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아무리 잔혹하고 폭력적이고 파괴적이라 할지라도 그에 대항하는 단호한 저항이 나타나면 쉽게 무너져버린다. 지금과 같은 절망과 무기력을 강요하는 현실에서, 그래도 우리가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이유는 무한한 인간의 정신이 빚어낸 승리의 역사적 교훈 때문이다.

그리고 그 희망을 우리는 먼저 여성과 사회적 약자들에게서 발견한다. 일상적으로 폭력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그들의 존재 조건 자체가 폭력을 미화하고 정당화하는 말들의 실체를 파악하는 능력을 길러주었기 때문에. 그들이 탈레반, 빈 라덴의 폭력과 부시의 보복 전쟁 폭력 사이에 별 다른 차이가 없다는 것을 그 어느 누구보다 잘 아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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