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3월 1일 시작된 KTX 해고 여승무원의 투쟁은 간접고용에 맞선 싸움인 동시에 성차별에 맞선 싸움이기도 합니다. 이들은 직장을 잃고 13년째 거리에서 겨울을 보내고 있습니다. ‘봄’이 올 때까지 여성신문은 KTX 해고 여승무원들의 목소리를 전하겠습니다.

 

‘준공무원 대우’ 믿고 입사

2년 뒤 내민 건 또 계약직

 

3일 서울 용산구 서울역 앞에 설치된 KTX 해고 승무원 천막농성장에 걸려있는 승무원 정복을 남소영 씨가 살펴보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3일 서울 용산구 서울역 앞에 설치된 KTX 해고 승무원 천막농성장에 걸려있는 승무원 정복을 남소영 씨가 살펴보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준공무원 대우’. 스물 여섯살 남소영씨의 눈에 들어온 이 여섯 글자는 그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 2004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남씨에게 공기업 채용란에 올라온 철도청(현 코레일) 승무원 채용 공고는 매력적이었다. “철도청이라는 공기관 소속으로 정년을 보장받는 안정적인 직업이라는 생각에” 그는 철도청에 이력서를 제출했다. 14대 1이라는 경쟁률을 뚫고 1기 승무원으로 입사할 때는 주변의 축하가 쏟아졌다.

그러나 입사 직후 철도청 경영교육원에서 승무교육을 받을 때부터 “무엇인가 이상했다”. 철도청 승무원이라는 채용 공고와는 달리 남씨와 동료들이 소속된 곳은 철도청 유관단체인 홍익회라고 했다. 정규직이 아닌 계약직이라는 소리에 곧 교육장은 술렁였다. 철도청 소속 교수들은 “2년 뒤에 철도청이 공기업인 한국철도공사(코레일)로 전환되면 너희들도 정규직으로 직접고용 될테니 걱정 말라”며 승무원들을 안심 시켰다. 대부분 이곳이 첫 직장이었던 승무원들은 이 말을 철썩 같이 믿었다. 하지만 2004년 말 이들은 철도청이 아닌 철도청 자회사인 철도유통으로 소속이 바뀌었다. 이 역시 계약직이었다. 남씨는 “일을 할수록 소속이 중요하다는 것을 체감했다”고 했다.

처음에는 철도청 소속 열차팀장과 회의를 하고 운영팀장에게 출무신고를 했지만 점점 철도청이 아닌 홍익회, 철도유통에 출무신고와 종무신고를 하도록 지시를 받았다. 출근할 때 사용하던 출구조차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약속과 달리 2006년 철도청이 공기업으로 전환됐지만 승무원들은 여전히 코레일 소속이 아닌 자회사 소속 계약직 신분이었다. 월급도 20~30만원 줄고 유니폼 값 마저도 월급에서 떼 갔다. 더 이상 가만히 앉아 정규직 전환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 2006년 3월 1일 남씨를 포함한 승무원 370여명은 ‘직접 고용’을 요구하며 거리로 나섰다. 사흘 뒤 철도노조의 다른 조합원들은 업무에 복귀하면서 거리에는 승무원들만 남았다. 시위나 파업을 해본 적 없던 남씨는 “화가 났지만 두려웠다”며 “그래도 뭐라도 해야겠다는 의지가 생겼다”고 말했다. “우리의 주장이 틀리지 않았다고, 정당한 주장을 하면 알아줄꺼라 생각했다”고 남씨와 동료들은 생각했다.

찬 바닥에서 노숙을 하고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농성도 했지만 아무도 이들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하지만 남씨는 “항상 나쁜 상황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했다. 2008년 법정 투쟁을 시작하고 1심과 2심에서 승리하면서 곧 복귀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높았던 적도 있었다. 남씨는 “우리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법원이 인정해줬고, 이제는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확신도 커졌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그 기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2015년 대법원은 코레일 소속 열차팀장의 업무와 KTX 여승무원의 업무가 각각 안전 관련 업무와 고객서비스 업무로 구분돼 있었다고 판결했다. 코레일과 여승무원들 사이에 ‘묵시적 근로계약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며 1·2심 판결을 뒤집었다.

대법원 판결 선고날은 지난 13년 동안 가장 힘든 날로 기억한다. “직장에 휴가를 내고 법정에 갔는데 패소 판결이 나는 걸 들으면서도 믿기지 않아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고 눈물도 나지 않았다”고 그는 말했다. 일주일 넘게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고 멍하게 허공만 바라봤다. 시간이 흐르면서 돈에 대한 압박이 커졌다. 1심에서 승소하고 코레일 측으로부터 받은 임금과 소송 비용을 반환해야 했다. 8640만원이라는 큰 돈을 갑자기 마련해야 한다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했다. 법률구조공단을 찾기도 했지만 꼬인 문제는 풀리지 않았다. 4대 종단의 중재로 가까스로 임금 반환 문제가 해결됐지만, 그 사이 함께 복직 투쟁을 하던 한 동료가 세상을 떠나는 일이 발생했다. 그렇게 12년을 함께 한 34명은 13년차를 맞으며 33명으로 줄었다.

남씨는 1심에서 승소한 뒤 보육교사 시험 준비를 해 어린이집 교사가 됐다. 안정적인 직장이지만 그는 지난 3월 일을 그만뒀다. 복직을 준비하기 위해서다. 어린이집 교사 특성상 학기 중간에 일을 그만둘 수 없어 미리 사표를 냈다. 최근 대법원의 ‘재판거래’ 의혹을 듣고 “짐작만 하던 일이 사실이라고 하니 정말 화가난다”며 “하지만 대법원은 재판거래가 없었다고 보도자료를 내며 발뺌하고 실체가 드러나지 않고 있어 답답하다”고 말했다. 최근 코레일이 승무원들에게 승무원이 아닌 다른 보직으로 ‘특별채용’ 하기로 했다는 보도에 대해서도 “13년 동안 승무원으로 직접고용 해달라는 우리들을 기만하는 처사”라고 비판했다. 남씨는 “더 이상 정치적으로 접근하지 말고 저희 문제 그 자체로만 봐달라”고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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