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초의 여성도공, 백파선 ①
조선 최초의 여성도공, 백파선 ①
  • 김선미 여성신문 기자
  • 승인 2018.07.25 08:40
  • 수정 2018-08-05 20: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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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 역사에도 보이지 않는 여성의 역사가 있다. 일본 도자기 발상지에서  추앙받는 '백파선'이 그렇다.  동시대 인물인 이삼평은 '도자기의 시조'로 널리 알려진 '공식' 위인인 것과 비교된다. 여성신문은 30년간 남성중심의 역사에 가려 알려지지 않았던 여성들을 조명하는 일에 앞장서 왔다. 이번 1500호에서는 여성신문은 이삼평을 비롯한 남성중심의 도자기 역사에 가려져 있던 조선 최초의 여성도공 ‘백파선’을 드러내고자 지난 7월 14,15일에 도자기의 산지로 유명한 일본 사가현의 아리타를 찾았다. <편집자주>

 

조선 최초의 여성도공,백파선

백파선을 되살리는 사람들 ②

백파선, '한일문화교류'를 이끌다 ③

 

 

일본 아리타의 조선 여성도공 백파선 좌상 ⓒ진주원 여성신문 기자
일본 아리타의 조선 여성도공 백파선 좌상 ⓒ진주원 여성신문 기자

남성도예가의 그늘에 가려져있던, 백파선

백파선은 아리타 도자기의 시조로 추앙받는 이삼평과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로, 일본 도자기의 발상지인 아리타에서는 ‘도자기의 어머니’로 불린다. 유교문화 속의 조선에서 도자기를 만드는 일은 특히나 존중받지 못하는 직업이었다. 더구나 여성 도공이라면 더 말이 필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백파선은 천민의 신분으로서 그만의 리더십과 기술로 일본 도자기 예술을 꽃피우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으나 남성 도예가의 그늘에 가려 지금껏 제대로 평가받지 못해 왔다. 여성신문은 신분과 성별과 국적을 뛰어넘어 일본 도자 예술의 한 축을 이끌어 온 백파선의 족적을 따라가 보고자 한다.



일본 규슈 후쿠오카시 하카다(博多)역에서 JR을 타고 한 시간 이십 분 쯤 달려가면, 도자기로 유명한 아리타(有田)에 도착한다. 아리타는 인구 이만명 정도가 사는 조용한 작은 시골 마을이지만, 일본 도자기의 발상지로 유명하다. 아리타 역에서 걸어서 7분 정도 가면, 길 양옆에 도자기 가게들이 즐비한 거리가 나온다. 그 거리 초입에 주차장이 넓은 단층 건물의 갤러리(관장 구보다 히토시)와 게스트하우스가 있다. 간판에는 ‘Gallery Baepasun, 백파선’이라고 영어와 한글로 쓰여 있다.

게스트 하우스 입구 한 켠에는 한복을 입고 쪽진 머리를 한 여인의 좌상이 있다. 그가 바로 ‘백파선’이다.

이 좌상은 지난 4월 29일 사단법인 한국도예협회와 조선도공기념사업회 산하 백파선기념사업회가 세운 기념상이다. <관련기사 4월 23일 보도 ‘첫 여성 도자기 장인 백파선 기념상 일본에 세워진다http://www.womennews.co.kr/news/view.asp?num=141387>

좌상은 한국의 안석영 작가가 최대한 조선 시대의 방식을 고증해 제작한 것으로, 기단과 좌대를 포함해 높이 1.8m 규모로 백파선이 치마저고리를 입고 앉아 다완(茶碗·찻사발)을 손에 받쳐 들고 들여다보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백파선 갤러리의 구보다 히토시 관장은 아리타와 한국을 오가며 백파선 알리기에 앞장서고 있다. 구보다 히토시 관장은 “아리타 도자기의 역사에는 분명히 백파선의 공의 지대한데, 지금까지는 남성도예가 이삼평만을 주목해 왔다. 아리타 도자기와 세계도자기 역사를 위해서라도 여성도예가 백파선을 조명할 필요가 있다”며 그 이유를 설명했다.

 

백파선 일가가 아리타로 이주하기 전, 도자기를 굽던 고도우게 가마터. 이 가마터는지금은 손실되었지만 오름가마의 형태였다.. ⓒ진주원 여성신문 기자
백파선 일가가 아리타로 이주하기 전, 도자기를 굽던 고도우게 가마터. 이 가마터는지금은 손실되었지만 오름가마의 형태였다.. ⓒ진주원 여성신문 기자

조선 최고의 도사기술자들과 가족들을 강제로 끌고가

일본의 도자기 역사를 말할 때 조선 도공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16세기 말 일본은 나라시대부터 중국과의 중요한 무역 통로였던 상하이 남쪽 항구 도시 닝보(寧波)를 정복할 목적으로 ‘가도입명(假途入明, 명을 정벌하러 가니 길을 빌려달라)’의 깃발을 내세워 조선에 길을 내 달라고 요구하며 조선을 침략했다. 1592년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를 선봉으로 수만의 군대를 조선으로 출병시키고 주력 부대도 부산에 상륙시켰다. 이 전쟁이 바로 임진왜란이다.

당시 조선은 중국과 함께 백자제작 기술을 가지고 있었는데, 일본은 임진왜란 발발 5년 뒤 다시 정유재란을 일으켜 조선 최고의 도사기술자들과 가족들을 강제로 끌고 갔다. 영주들은 조선도공들을 고용하여 직접 가마를 운영하며 기술과 부를 쌓아 갔다. 17세기 들어 당시 유럽에 도자기를 수출하던 중국이 명?청 교체기 전쟁과 혼란으로 백자 생산이 어렵게 되자 조선 도공이 만든 아리타 도자기가 대규모로 유럽에 수출되기 시작했다. 도자교역을 통해 일본은 엄청난 부를 축적하는 한편 이를 계기로 세계 문물에 눈뜨게 되면서 일본 근대화의 태동이 시작되었다.



 

나카시마 히로키의 책 ‘비전도자사고
나카시마 히로키의 책 ‘비전도자사고' ⓒ이유진 기자

도공과 식솔 960여명을 이끌어

백파선은 한국인 도자기공 김태도의 배우자로 임진왜란 때 남편과 함께 일본으로 끌려갔다. 나카시마 히로키(中島浩氣)의 책 ‘비전도자사고(肥前陶磁史考)에 의하면, 당시 조선으로 군대를 이끌고 온 나베시마와 고토 이에노부가 스님을 데려왔는데 평소 불심이 깊었던 백파선 남편 김태도는 일본으로 끌려가는 과정에서 스님을 의지했다고 한다. 그 스님의 절이 광복사였고, 김태도 일가도 처음 일본으로 가서 광복사 근처에 머물렀다. 광복사는 다케오 온천지역에 있는 절이다. 김태도는 이 절에서 약 1년 정도 머물며 도자기를 구울 장소를 물색했다고 한다. 스님은 김태도에게 후카우미 소덴(深海宗傳)이라는 일본 이름을 지어줬다. ‘후카우미’란 한자로 ‘심해’로 표기한다. 이는 김태도 일가가 조선 ‘심해’에서 왔기 때문이라는데, 당시 조선에는 ‘심해’라는 지명이 없었다. 따라서 ‘심해’는 가장 비슷한 발음의 ‘김해’를 잘못 발음한 것으로, 김태도 일가의 고향이 ‘김해’라는 설이 유력하다. 고토가 당시 김해에 성을 쌓았다는 자료도 이를 뒷받침한다. 김태도는 고토의 보호아래 사가현 다케오에서 도자기를 구웠는데 69세로 사망, 배우자 백파선이 그 뒤를 이어 가마소를 번영시켜 영주의 신임을 얻게 된다. 1616년 이삼평이 아리타 이즈미야마에서 백자도석을 처음 발견하여 고급 백자를 생산하자 백파선도 영주의 허락을 받아 도공과 식솔 960여명을 이끌고 아리타의 히에고바로 이주했다. 백파선의 도예가로서의 리더십을 짐작케 하는 지점이다.

현재 사가현 우레시노에 거주하는 부산출신 도예가이자 백파선 갤러리 부관장인 노진주 씨는 “당시 도공들의 반 정도는 여성이었을 것이다. 도자기 제작 과정은 분업화되어 있어서 남성은 물레, 여성은 유화작업, 마무리 작업 등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백파선의 묘비를 둘러보고 있는 구보다 관장 ⓒ진주원 여성신문 기자
백파선의 묘비를 둘러보고 있는 구보다 관장 ⓒ진주원 여성신문 기자

'도자기의 어머니'로 추앙받아

백파선은 본명이 아니다. 역사 속 여성들이 그러하듯, 백파선 또한 정확한 이름은 전해지지 않았다. 백파선은 1656년96세의 나이로 생을마감했다. 당시 평균수명이 50세 정도였던 시대였기때문에, 당시로서는 매우 장수한 편이다. 그래서 자손들은 ‘백 살까지 산 할머니’라는 듯으로 백파선이라 불렀다고 한다. 사가현의 호온지에 있는 백파선의 법탑 만료묘태도파지탑(萬了妙泰道婆之塔)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 법탑은 백파선이 사망한 지 50년째인 1705년에 증손자인 심해당선(深海堂仙)이 세웠다. 법탑에는 "증조모의 이름은 알 수 없다. 증조모는 얼굴이 온화하고 귀가 축 늘어졌으며 성격이 자애로웠기 때문에, 후손들이 존경하는 마음으로 백파선(百婆仙)이라고 불렀다"고 쓰여 있다. 법탑이 있는 호온지 뒤쪽에는 작은 산이 있는데, 이 산에서는 이삼평 자손과 백파선 자손이 일 년에 한번 모여 조선 땅을 바라보며 제사를 지낸다. 일명 ‘망향동산’이다. 백파선과 그의 남편이 일본으로 끌려올 때 5,6살로 추정되는 아들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 아들 헤이자에몬은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를 도와 도자기를 구웠으며, 헤이자에몬에게는 2남 7녀의 자녀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그 이후 아리타 지역에는 곳곳에서 백파선의 자손들이 도자기업과 관련된 일에 종사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아리타에서 본지 기자와 만난 백파선의 16대 자손 후카우미 야스시 씨는 후카우미산류도(深海三龍堂)라는 도자기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후카우미 씨는 “비록 나는 판매업을 하고 있지만 할머니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에 이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운명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백파선을 주인공으로 한 뮤지컬 백파포스터
백파선을 주인공으로 한 뮤지컬 '백파'포스터

여성사로서 사료발굴 필요

1800년대 아리타지역에 큰 화재가 있어서 중요 문서들이 모두 불타고, 절에서 보관한 문서들만 남아있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파선의 이야기는 한국과 일본에서 문화 예술의 소재로 종종 사용되기도 했다. 2005년 일본에서는 백파선을 모델로 한 뮤지컬 ‘햐쿠바(百婆)’(각본·연출 요시모토(吉本哲雄))를 공연했다. 거의 1년동안 120회에 걸쳐 전국에서 공연했다. 또 규슈 출신의 작가 무라다 기요코의 책 “용비어천가”(분슈분코, 2004년)은 백파선을 모델로 삼으며 아리타 지역 일대의 조선 도공의 삶을 그렸다. 한국에서도 백파선을 소재로 한 드라마가 방영됐다. 지난 2013년 MBC에서 방영된 ‘불의 여신 정이’가 그것이다. 배우 문근영(정이 역)이 백파선으로 분해 열연을 펼친 드라마이다.

김해시는 2016년 10월 진례 분청도자관에서 일본 아리타현의 ‘백파선 갤러리’와 도예문화 교류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김해와 아리타현 도예 교류를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백파선에 관한 사료발굴이나 연구는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실정이다. 사회 구조때문에 드러나지 못했던 여성의 역사를 하나하나 찾아내는 것은 앞으로의 우리 과제다.  이는 촛불 이후, 우리 사회에 주권재민의 목소리가 더 명확해진 현시점에서 신분과 성별을 뛰어넘는 리더십을 발휘한 백파선의 진가에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도자기 역사에서 여성의 위치를 제자리 찾아주고, 이를 통해 여성들이 만들어가는 한일 간의 평화교류, 문화 교류가 된다면 앞으로의 양국관계의 또 하나의 실마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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