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책임을 묻는데 앞장 선 원폭피해여성들] 임복순 “이 고통을 누가 알겠오”
[일본의 책임을 묻는데 앞장 선 원폭피해여성들] 임복순 “이 고통을 누가 알겠오”
  • 김경애 전 동덕여대 교수·여성학
  • 승인 2018.08.14 09:51
  • 수정 2018-08-15 18: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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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에 원자폭탄 피해

전신화상 입고 고향 청주로

아픈 몸으로 피해자 돌보며

일본 정부에 치료 요구

 

히로시마원폭병원을 퇴원하는 임복순(오른쪽)과 엄분연. ⓒ김기진, 전갑생, 2012, 원자폭탄, 1945년 히로시마. 2013년 합천, 선인
히로시마원폭병원을 퇴원하는 임복순(오른쪽)과 엄분연. ⓒ김기진, 전갑생, 2012, 원자폭탄, 1945년 히로시마. 2013년 합천, 선인

엄분연과 함께 일본 정부에게 치료를 요구하고 일본 원폭피해자에게 교부하는 ‘피폭자건강수첩’을 자신들에게도 교부해달라고 요청했던 임복순은 14세인 시립 제3초등학교(고등과) 재학 때 근로동원으로 가옥 소개 작업을 하고 있다가 원자폭탄 피해를 당했다. 임복순은 원자폭탄이 떨어지는 순간 “노란 번갯불이 번쩍하는 것을 보았을 뿐 아무 기억이 없”고, 함께 작업하던 급우 65명 중 40여명이 현장에서 죽었다.

임복순은 전신화상을 입어 머리카락이 없어지고 반 해골이 되다시피 한 몸을 붕대로 감고, 온몸에 고름이 솟고 구더기가 끓는 처참한 상태로, 목과 팔에 부상당한 아버지의 품에 안겨 고향 청주로 돌아왔다. 그 처참한 모습으로 거리에 나가면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오랜 치료 끝에 일시적으로 나아 “병신이라 시집도 못 갈 줄 알았는데” 머리카락이 다시 나자 부모는 원폭피해자라는 것을 감추고 시집을 보냈고 2남 2녀를 낳았다.

그러나 임복순은 결혼 후에도 원폭 투하 당시 강렬한 빛에 놀란 탓에 불만 보면 현기증으로 쓰러졌으며, 수족이 뒤틀리고 힘이 없어 가사노동을 제대로 못했다. 딸 하나는 소아마비로 죽었고, 남아있는 나머지 3남매도 허약체질인데다 모두 갖가지 중병으로 큰 수술을 받자, 남편은 “당신 때문에 자식들까지 모두 망쳐놓았다”고 비난했고 결국 별거하게 되었다. “밥보다도 약으로 병구를 지탱해왔다”는 임복순은 한때 전세방에서 쫓겨 나 한강변 모래사장에 천막생활을 하면서 집단자살을 하려고 연탄을 피워 놓기도 했으나 “철없이 자는 자식들이 불쌍해서” 다시 꺼내기를 되풀이하기도 했다.

 

‘디딤돌’ 히로오카 캐이

임복순이 원폭피해자임을 드러낸 것은 일본 언론인 히로오카 캐이가 1965년 한일협정 이후 취재차 한국에 와서 일제 강점기의 한국인 희생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취재를 했을 때다. 히로오카 캐이가 판자촌의 구불구불한 길을 지나 집을 찾아 갔을 때 자신이 원폭피해자인 것을 어떻게 알았느냐고 반문했다. 홀로 침묵 속에서 자신의 육체적 고통과 가난, 아픈 자식을 바라보는 어미로서의 고통, 그리고 남편으로부터 비난과 함께 버림받으며 살고 있는 자신을 찾아온 일본인을 놀라움으로 맞이하면서 자신의 사정을 호소했다. “‘원폭의 돌’이 가까워지면 팔다리가 녹작지근하고 몸이 쑤셔대요. 뼈 속에 바람이 들어가는 느낌”이고, “허리에서 다리로 내려오면서 경련을 일으키듯” 통증을 느낀다며 병원에서 진찰받고 싶다고 호소했다. 히로오카 캐이가 1968년 2월 다시 임복순을 방문했는데, 이 때 임복순은 “어두컴컴한 온돌방 구석에서 누더기 이불을 덮고 여섯 달 동안이나 자리를 보전하고 있고, 몰골이 딴 사람 같이 되어 있었다. 옆에는 둘째 아들 김윤식군(1955년생)도 같이 드러누워 있었다”고 한다. 임복순은 “이 고통을 누가 알겠오”라고 호소하면서 “이제 소생할 길이 없는 죽은 목숨이므로 숨이 끊어지기 전에 내 몸을 시험대에 올려놓고 연구재료로 써 달라고 절규하였다.”

일본에서 일본인피폭자와 동일한 치료를 요구하며 신청했던 피폭자 건강수첩 교부는 거부되어 임복순은 엄분연과 함께 큰 좌절감을 겪었다. 엄분연과 임복순은 1968년 일본에 가기 전에 두 사람 모두 히로오카 캐이를 만났고, 히로시마 원폭병원에서 치료받을 당시 도움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히로오카 캐이는 “후생성에서 히로시마 시로 송부된 회답에 ‘수첩을 내지 못한다’는 통보를 하자 이 두 사람은 치료비 등의 걱정으로 낙담과 실망은 컸고 ‘무엇 때문일까요?’라면서 ‘날카로운 말투로’ 자신에게 대들었다라고 기록했다. 히로오카 캐이는 “이 질문에 가슴을 펴고 대답할 수 있는 일본인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라고 일본인으로서 죄책감을 표현했다.

2개월 반 동안 치료를 받고 돌아온 후, 얼굴에는 아직도 “화상의 흔적이 지도처럼 그려져 있지만”, 치료의 효과가 있어 몸 상태가 호전되었다. 그러자 임복순은 취업을 했는데, 도로 공사장에서 자갈을 나르기도 하고 야채장사도 하였다. 마침 한일협정 이후 일본인들의 한국 방문이 늘어나자 일본어를 할 줄 알았던 사람들에게 새로운 일자리가 생겼다. 임복순은 한국말을 잘 못해서 ‘진정서’를 ‘진전서’로 읽을 정도로 오히려 일본어에 능통했는데, 일본어 능력을 활용하여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여행사 안내원, 화장품 장사 등을 했다. 또한 일본인 상대 백화점의 점원을 하면서 활달하고 적극적인 성격으로 “일본말 잘하고 장사도 잘”하여, 마침내 전세방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임복순은 “자녀들에게 공부를 못시켰을 뿐더러 딸 하나는 돈 3천원이 없어 중학교 졸업장도 못 받고 나왔다”며 안타까워했다.

 

47세에 원폭피해자병원서 사망

임복순은 ‘한국원폭피해자협회’ 서울지부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며 설립 초기에 친척과 친구들을 협회에 가입하도록 권유했다. 원폭피해자 변연옥을 반도조선아케이드에 취직시켜주는 등 주변의 원폭피해자들을 돌보기도 했다. 또한 일본 잡지에 3편의 글을 게재해 자신이 당했던 원폭 피해와 그 이후의 삶에 대해 설명하고, 일본인들에게 한국 원폭피해자를 도울 것을 호소했다. 임복순은 자궁암으로 일본의 원폭피해자를 위한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으나 치유하지 못하고 1979년 47세의 나이로, 친정 가족 중 12번째로 원폭희생자가 되어 사망했다.

 

강요된 침묵 깬 여성들

손귀달과 임복순은 원폭증 때문에 남편으로부터 이혼당하거나 별거를 해야 했고, 엄분연은 남편이 6.25전쟁에서 전사해 아픈 몸을 이끌고 홀로 생계와 자식의 양육 책임을 져야했다. 그러나 이 세 여성들은 자신의 고난을 딛고, 원폭피해자들을 둘러싼 강요된 침묵을 깨고 자신들의 고통을 세상에 드러냄으로써 한국에 살고 있는 원폭피해자들이 신음하고 있음을 일본 사회에 주지시켰고, 또 그들이 일본이 조선을 강제 점령하여 수탈하였고, 또 강제로 노동과 전쟁에 동원한 결과로 아직도 많은 한국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음을 알렸다. 손귀달과 엄분연과 임복순 이 세 여성은 밀항자라는 이유와 속지주의라는 이유로 치료와 일본인 피폭자와 동일한 대우를 해달라는 요구는 거부되었으나, 1969년 2월 22일 일본 히로시마에서는 ‘피폭자구원일한협의회(被爆者救援日韓協議會)’가 외국인피폭자에게 피폭자수첩 교부를 호소하는 가두서명을 벌였고, 그 다음해 1969년 5월8일 일본 국회에서 한국인피폭자문제가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논의되는 계기가 되었고, 한국원폭피해자의 일본에서의 치료와 수당 수령이 가능하게 된 손진두 소송이 승소하는데 기여했다.

선구적인 이 세 여성들을 호명하여 그들의 삶을 안다는 것은 격변의 근현대사 속에서 당했던 그들의 고통과 슬픔을 나누는 것이다. 또한 고통과 슬픔에 굴하지 않고 오랜 침묵을 깨고 당당하게 나선 그들의 모습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여성들이 나아가야할 방향을 읽는다. 이것이 한국여성운동사가 이 세 여성을 기억해야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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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福順, 1972, “日本の友人に忠言する”, 経済時代 37(10)(460)// p93~95 経済時代社, 1972-10

林福順, 1977, “苦 /// 淵 ” 未來社.

林福順, 1983, “그날 히로시마의 背負///” 日本/原爆文學14 手記/記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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