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은 여자 혼자만의 권리나 의무가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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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방>, <더 월>

지난 15일 개봉한 영화 ‘하얀방’은 단편영화계에서 실험영화로 기대를 모았던 신예 임창제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이은주(수진 역), 정준호(최형사 역)라는 두 인기 배우의 출연과 겨울에 드문 공포 스릴러물이라는 점 외에도 여성의 낙태문제가 이야기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어 관심이 집중됐다.

여성의 자궁을 의미한다는 하얀방,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영화는 이유를 알 수 없는 한 여자의 죽음, 그리고 연이어 일어나는 의문의 살인사건을 쫓아간다. 사건의 유일한 단서는 죽은 여자들이 모두 같은 인터넷 사이트(산부인과)에 접속했다는 것과 임신하지 않았는데도 모두 임신한 채 죽었다는 것이다.

공포 스릴러물의 모든 장치를 제거하고 시나리오의 뼈대만을 본다면 이 영화는 야심만만한 한 남자(정이석)가 과거에 그의 아이를 갖게 된 한 여자(유실)에게 자신의 장래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폭력으로써 낙태를 강요하고, 끝내 유산하게 된 여자는 죽게 돼 낙태를 원하는 다른 여자들을 죽음으로 이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하얀방’은 낙태(인공유산)와 유산으로 인한 원한과 공포, 그리고 그 죄값에 대한 질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왜 낙태에 대한 죄값은 여자에게만 해당되는가. 낙태를 하도록 종용한 상대 남자는 왜 고통 받지 않는가.

여성의 눈으로 본 임신과 낙태에 관한 보고서

여기 ‘더 월’(낸시 사보카 감독, 1996년작)이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는 미국에서 케이블 TV 상영용으로 제작된 것으로 낙태라는 주제를 50년대, 70년대, 90년대로 나누어 시대에 따라 각기 다른 세 이야기를 통해 풀어내고 있다.

1952년 낙태가 불법이던 시절, 결혼한 지 1년도 되지 않아 남편을 잃은 클레어(데미무어 분)는 자상하게 보살펴주던 시동생과 실수로 임신을 하게 된다. 죽은 아들 대신 클레어를 친딸처럼 여기는 시부모님과 자신의 과오를 자책하며 괴로워하는 시동생 사이에서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결정한 클레어는 두통약을 다량 섭취하기도 하고, 뜨개질용 바늘로 혼자 유산을 시도한다. 그러나 결국 싸구려 의사에게 자신의 집 식탁 위에서 불법 낙태 수술을 받던 클레어는 수술이 잘못돼 고통 속에 죽어간다.

1974년 클레어가 살던 집에는 2남 2녀의 자녀를 둔 바브라 가족이 살고 있다. 변변치 못한 살림 속에서 네 아이의 뒤치다꺼리에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는 바브라는 젊은 시절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기 위해 공부를 결심한다. 그러나 그 순간 또다시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 바브라는 늦게나마 다시 시작한 공부를 포기해야 할 기로에 서게 된다. 남편은 모든 결정을 바브라에게 넘길 뿐이고, 곧 대학에 진학하는 딸은 경제적인 이유로 원하는 대학에 못 가게 될까봐 바브라에게 낙태를 요구한다. 모성과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의 삶, 둘 사이에서 고민하던 바브라는 결국 아이를 낳기로 결심한다.

22년이란 세월이 흐른 1996년. 독실한 천주교 집안에서 자란 대학생 크리스틴은 유부남인 해리스 교수의 아이를 갖게 되고, 돈으로 해결하려는 교수에게 심한 배신감과 수치심을 느껴 낙태를 결심한다. 낙태 반대주의자인 룸메이트 코리와 종교단체 여성들은 낙태가 반인륜적인 행위라고 규탄하며 그녀를 설득하지만 크리스틴은 가족계획소에서 경영하는 병원으로 향한다. 당시 낙태반대주의자들의 극렬한 시위로 병원에서 낙태 수술을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고, 겨우 수술을 끝낸 베스박사(셰어 분)는 한 극렬분자인 남자의 총에 죽게 된다.

이 영화의 원제는 ‘만일 이 벽이 말을 한다면(If these walls could talk)’이다. 여기서 벽이란 ‘자궁벽’을 의미한다. 데미 무어가 제작에 참여하고 각본, 감독을 모두 여성이 맡은 이 영화는 여성의 눈으로 본 임신과 낙태에 대한 보고서라 할 수 있다.

생명의 탄생은 인류의 원천이자 생의 축복과도 같은 것이다. 그런 소중한 생명을 품고 자라게 하는 몸을 지닌 여자에게서 낙태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치명적인 고통이다. ‘하얀방’의 유실이나 ‘더 월’의 클레어와 크리스틴처럼 원치 않은 임신일 경우에 겪어야 할 정신적 충격과 괴로움은 한 여성의 인생 전체를 가르는 일생일대의 사건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낙태를 원하는 자가 여성이 아닌 남성인 경우 낙태를 한 여성 본인은 버림받았다는 충격과 함께 아이에 대한 죄책감으로 이중고를 겪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현재 법적으로 낙태를 금지하고 있다. 인공임신중절수술의 허용한계는 우생학적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을 가지고 있을 때만 가능하다. 그러나 성에 무지한 청소년이나 우발적 실수에 의한 임신의 경우 여전히 불법 수술을 감내하면서 암울한 시절을 보내거나, 그렇지 않은 경우 미혼모가 돼 아이를 고아원이나 입양소에 보내는 경우가 많다. 아직도 곳곳에서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는 여아 낙태에 대한 문제도 그 원인은 남아를 낳지 못하는 여자에게로 향하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프랜시스 쉐퍼 박사는 영화 ‘인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에서 낙태에 대한 최대의 적은 낙태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라고 말한다. 생명의 존엄성을 잊지 말기를 바라는 질타의 말일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존엄성은 생명이 잉태되는 그 자리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임신은 여자 혼자만의 권리나 의무가 아니기 때문이다.

윤혜숙 객원기자 heasoo21@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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