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등 실존 인물 소재로 팬픽·그림
2차 창작하는 팬덤 하위 문화 ‘알페스’
‘AI 이루다’ 성희롱 논란 이후 중단되자
‘알페스=성범죄’라며 “공론화”한 남성들
청원 ‘좌표’ 찍고 여초 반응 퍼나르며 조소

 

'알페스(RPS)' 처벌을 촉구하는 내용의 청와대 국민청원이 게시 나흘 만에 19만명 이상의 동의를 얻었다. 사진 =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 캡쳐
'알페스(RPS)' 처벌을 촉구하는 내용의 청와대 국민청원이 게시 나흘 만에 19만명 이상의 동의를 얻었다. 사진 =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 캡쳐

 

인공지능(AI) 챗봇 ‘이루다’가 불러온 ‘알페스(RPS·Real Person Slash)’ 논란이 정쟁화하고 있다는 비판이 커지고 있다. ‘온라인 커뮤니티’ 발 논란을 언론이 속보 경쟁하듯 중계하며 논란을 키웠다는 지적도 나온다.

나흘 만에 20만명 가까이 동의 얻은 ‘알페스 처벌’ 청원

지난 11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남자아이돌 ‘알페스’ 이용자들을 강력 처벌해달라”는 청원에 19만명 넘게 동의했다. 불과 나흘 만에 청와대 답변 요건인 20만명에 바짝 다가섰다.

청원 작성자는 “최근 트위터 음지에서 ‘알페스’ 문화가 유통된다는 사실이 한 래퍼를 통해 공론화됐다”면서 “수많은 남자 연예인이 이러한 ‘알페스’ 문화를 통해 성적 대상화가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작성자는 성착취 범죄인 ‘n번방’ 사건을 언급하며 “‘알페스’ 이용자가 소비권력을 통해 피해자들의 약점을 쥐고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들겠다는 태도는 n번방과도 같은 수많은 권력형 성범죄 가해자들의 태도를 떠오르게 한다”고 주장했다. 또 “피해자가 여성이든 남성이든 그 누구라도 성범죄 문화에 있어서 성역이 될 수 없다”고 했다.

이른바 ‘알페스 청원’은 에펨코리아 등 ‘남초 커뮤니티(남성 이용자가 다수인 온라인 커뮤니티)’가 앞장서 참여를 독려했다. 국민청원 참여 현황을 게시판에 실시간으로 공유하며 참여를 독려하는 한편, 언론에 자료를 보내 기사화를 요구했다. 기사가 나면 ‘좌표 찍기(기사 링크 공유)’를 통해 댓글 여론을 관리하고, ‘여초 커뮤니티’와 트위터 반응을 게시판에 중계하며 조소하거나 “대응 전략”을 짰다.

‘이루다’ 서비스 중단이 부른 강력한 온라인 ‘남성연대’

남초 커뮤니티가 주도한 ‘알페스 논란’은 AI 챗봇 ‘이루다’ 서비스 중단에서 비롯됐다. 일부 남초 커뮤니티에서 인공지능(AI) 챗봇 ‘이루다’를 성착취 하는 법이 공유된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서비스 중단을 촉구하는 항의가 이어졌다. 성착취 논란 이후 개인정보 침해, AI 윤리 문제까지 이어지면서 개발사가 서비스를 잠정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알페스 논란이 시작된 것은 이 지점이다.

서비스 중단에 분노한 남성 이용자들은 “가상 존재인 AI 인권까지 챙기는 여성들이 알고 보니 실존 인물인 남자 아이돌 성희롱을 한다”면서 알페스를 문제 삼기 시작했다. 커뮤니티 게시판에 n번방과 알페스를 비교하는 글이 올라오고 청와대 국민청원을 올렸다. 여초 커뮤니티 댓글 반응을 캡쳐해 공유하며 ‘이중 잣대’라고 비웃는 게시물도 이어졌다. “청원 20만 돌파를 못하면 여초, 페미(니스트)에 지는 것” “알페스는 페미들의 역린” “알페스가 묻히면 한국 남성의 삶은 끓는 물 속 개구리”라는 글도 올라와 이용자들의 호응을 얻었다. 이들은 알페스 논란을 “공론화”라고 부르고 있다. 청원이 20만명에 가까워지자 남초 커뮤니티는 “해냈다”고 환호했다.

알페스가 n번방·딥페이크와 동급이라는 남성들

“알페스 공론화”를 외치며 이용자 처벌을 요구하는 남성들은 알페스를 n번방·딥페이크와 같은 성착취와 동급이라고 주장한다. 전문가들은 “자신이 좋아하고 숭배하는 아이돌과 캐릭터의 얼굴과 성격을 빌려 상상하는 창작물과 상대의 자기 의지를 박탈해 지배하려는 성착취를 동일선상에 놓을 수는 없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알페스란, 아이돌이나 영화 캐릭터 등 실존 인물이나 캐릭터를 소재로 한 팬픽(팬이 쓴 소설), 팬아트(캐리커쳐, 만화 등), 트위터에 올린 짧은 ‘썰(글 모음)’ 등 모든 2차 창작을 가리키는 팬덤 내 하위 문화다. 1960년대 후반 미국 TV드라마 ‘스타트렉’ 남자 주인공들을 소재로 한 팬픽에서 시작했다. 과거에는 ‘음지 문화’였지만 지금은 팬픽이 소설과 영화로 만들어지며 대중의 인기를 얻고 있다. 영화 ‘트와일라잇’ 팬픽이 모티브가 된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그룹 원디렉션의 팬픽을 스크린에 옮긴 영화 ‘애프터’, 소설과 드라마로 유명한 ‘오만과 편견’의 팬픽에서 비롯된 영화 ‘브리짓존스의 일기’ 등이 대표적이다. 국내 아이돌 기획사도 팬픽, 팬아트 등을 아이돌 코어 팬층을 확보하기 위한 문화로 인정하거나 장려하기도 했다. 2006년 SM엔터테인먼트는 그룹 동방신기 팬픽 공모전을 열었고, 빅히트엔터테인먼트는 소속 그룹마다 새로운 ‘세계관’을 설정한다. 그룹 멤버들마다 캐릭터를 부여하고 서사를 풀어낸다. 팬들은 이 세계관을 ‘떡밥’ 삼아 제2의 콘텐츠를 ‘연성’하며 즐긴다.

지금 논란이 되는 성적 표현의 수위가 높은 ‘19금 팬픽’은 다양한 알페스 중 한 갈래다. 아이돌이나 캐릭터이 성적 부분을 지나치게 부각시킨 팬픽을 둘러싼 윤리적 문제는 팬덤 내에서도 오랜 논쟁 대상이었다. 그동안 팬덤의 진화와 함께 과도한 성적 표현과 전통적 성별 고정관념 문제 등의 다양한 논의가 이어져왔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알페스 문화와 논의에 대해 정확히 알려고 하지 않은 채 알페스 전체를 성착취 범죄와 동류로 비교하는 것은 문제적이라고 지적한다. 약점을 잡아 피해자의 삶을 파괴하고 노예화 시키고 불법촬영물을 유통해 이익을 얻는 성착취 범죄인 n번방 사건과 알페스를 동일선상에 둘 수 없기 때문이다. 또 국민청원에서 사용되며 확산된 ‘알페스 이용자’, ‘알페스 운영자’라는 표현은 실제 알페스 문화 내에서는 전혀 쓰이지 않는 표현이다.

알페스, 온라인 ‘남성연대’의 도구로 이용?

알페스 논란은 “이루다 서비스를 중단”시키고, “n번방 이용자 전원 신상공개를 요구하며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만드는 여성들에게 “본 때”를 보여주기 위한 온라인 ‘남성연대’의 도구로 이용됐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알페스의 옳고 그름을 논하는 것이 지금 논란에선 의미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지금의 알페스 논란은 그동안의 논의를 비롯해 꾸준히 문제제기 돼온 여성 아이돌을 향한 성희롱 문제와 아이돌 산업 자체가 가진 착취 구조는 외면한 채 이뤄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연혜원 사회학 연구자(퀴어팬덤 문화 세미나 ‘퀴어돌로지’ 기획자)는 “알페스 논란은 그동안의 논의를 비롯해 꾸준히 문제제기 돼온 여성 아이돌을 향한 성희롱 문제와 아이돌 산업 자체가 가진 착취 구조는 외면한 채 이뤄지고 있다”면서 “최근 알페스를 하는 개개인의 SNS 계정을 특정해 자료를 퍼 나르며 사이버불링을 하고 욕설과 협박을 하는 남성들까지 등장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SNS에서 화제가 된 ‘기본권 말고 기분권’이라는 표현을 언급하며 “여성들을 향한 남성들의 공격은 알페스 논란이 인권 같은 기본권에 대한 문제제기라기보다는 ‘내 기분을 상하게 한 여성들을 향한 복수’로 보이는 이유”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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