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만6549번의 말하기가 일군 변화… “그것은 본능 아닌 ‘강간 문화’다”
8만6549번의 말하기가 일군 변화… “그것은 본능 아닌 ‘강간 문화’다”
  • 이하나 기자
  • 승인 2021.10.09 12:41
  • 수정 2021-10-12 11: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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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 30주년 맞은 한국성폭력상담소
1991~2020년 상담 전화 8만6549건
“기득권 위해 성차별, 소수자 탄압하고
정치가 사회곳곳에서 퇴행을 만들지만
더 나은 삶 위한 싸움 포기 않겠다”
한국성폭력상담소 30주년 기념식 영상에서 활동가들이 비전선언문을 낭독하는 모습. 이들은  “더 나은 삶을 위한 싸움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유튜브 영상
한국성폭력상담소 30주년 기념식 영상에서 활동가들이 비전선언문을 낭독하는 모습. 이들은 “더 나은 삶을 위한 싸움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유튜브 영상

‘성폭력’이라는 말조차 낯설던 1991년 4월13일 우리나라 최초의 성폭력 전담 상담기관인 한국성폭력상담소가 문을 열었다. 아동 성폭력 피해의 심각성을 알린 ‘김OO 사건’(1992년), 최초 성희롱 소송인 ‘서울대 신교수 사건’(1993년),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2004년) 등 우리 사회에 성폭력의 심각성을 알린 사건의 피해자 곁엔 늘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있었다.

한국성폭력상담소가 그동안 받은 상담은 8만6549회(1991~2020). 8만번 넘는 피해생존자들의 말하기는 우리사회에 균열을 내고 변화를 이끌어낸 계기였다.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이들의 곁에서 ‘사적인’, ‘수치스러운’, ‘여성의 정조에 대한 문제’, ‘여성들의 거짓말’로 치부되던 일들을 ‘성폭력’이라고 명명하고 ‘농담’이나 ‘실수’, ‘본능’으로 불리던 문제에 ‘강간 문화’라는 이름을 붙였다. 성폭력특별법 제정, 성희롱의 법제화 등에 힘썼고, ‘성폭력생존자 말하기대회’, ‘밤길 되찾기 달빛시위’, 책·영화 제작 등을 통해 성폭력 피해생존자의 치유와 자립을 도왔다.  

1993년 성폭력특별법 제정 촉구를 위한 여성단체회원들의 국회 앞 행진. ⓒ한국여성단체연합
1993년 성폭력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국회 앞에서 행진을 하는 모습. 그해 12월 성폭력특별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지난 6일 저녁 한국성폭력상담소는 30주년 기념식을 열고 비전선언문을 발표했다. 글에는 지난 30년을 되돌아보고 앞으로 상담소의 운동 방향에 대한 다짐이 담겼다. 

단체는 비전선언문에서 “피해자의 권리로 만들어 온 법‧제도적 절차와 기준은 자본이 대거 투입된 ‘시장’에서 가해자를 지키는 자원으로 악용되고 있다”며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성차별, 소수자 탄압, 약자혐오를 확산하는 몸부림, 이를 부추기는 정치가 사회 곳곳에서 퇴행을 만들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럼에도 이들은 “더 나은 삶을 위한 싸움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상담소는 “할 만큼 하지 않았냐고 할 때 멈추지 않고 끝까지 가겠다”며 “권리를 특혜라고 이름 붙이며 박탈하려고 할 때 강고한 연대로 맞서며, ‘자격 없는’ 여성들과 세상을 바꾸겠다”고 선언했다. 이어 “다양한 조건과 삶의 불평등을 살피고, 서로 의지하고 돌볼 수 있는 관계, 평등하게 나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한국성폭력상담소 30주년 비전선언문 전문.

균열을 일으키는 용기, 일상에 스며드는 변화

말하기 시작하자 균열이 일어났다. 당연한 줄 알았던 일상이 당연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가족, 학교, 일터, 길거리, 온라인 등 모든 공간에서, 아는 관계와 모르는 관계에서, 성차별과 성폭력은 흔히 일어났다. ‘농담’이나 ‘실수’, 심지어 ‘본능’이나 ‘역할’로 불려온 것들을 우리는 ‘강간 문화’라 명명했다. 우리는 예민한 것이 아니라 부당함과 불의에 분노한 것이다. 갈등을 만든 것이 아니라 문제를 발견한 것이다.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 것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언어와 대안을 만들어온 것이다.

침묵을 뚫고 나오는 파열음 같은 말하기를 마주한다. 생존자의 말하기는 문화예술이나 정치이론만큼 힘 있는 진실로 세계의 범주를 넓히며 변화를 만들었다. ‘정상성’ 규범에 어긋나는 목소리, 불평등한 성별 권력 구조에 무시됐던 목소리는 존엄한 삶을 여기로 가져왔다. 우리의 안테나는 낯선 표정, 새로운 말, 용인되지 않은 감정을 숨기거나 피하지 않으며 서로 신호를 보내고 받는다.

의미들이 반짝이고 가슴 벅찬 감동으로 공명하는 경험 속에서 우리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을 길어온다. 반성폭력 운동은 성폭력을 ‘정조에 관한 죄’로 바라보고 피해자가 ‘얼마나 강하게 저항했는지’, ‘보호할 만한 여성인지’ 따져 묻던 가부장적 법과 판례를 바꾸었다. 피해자의 인권 보장을 위한 제도와 지침을 마련했다. 피해자를 쉽게 의심하고 비난하는 성폭력 통념을 깨고 ‘피해자다움’이란 없음을 밝혔다. ‘동의 없는 성적 행위는 성폭력’이라는 새로운 인식과 담론을 확산했다. 절박한 생존의 문제를 맞닥뜨릴 때도, 거대한 권력과 위력 앞에서도,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가늠하기 어려울 때도 우리는 계보 있는 자신감 위에 서서 길을 잃지 않는다.

공공의 영역은 이윤에 부쳐지고 권리를 가질 자격에 증명을 요구하는 시대이다. 피해자의 권리로 만들어 온 법‧제도적 절차와 기준은 자본이 대거 투입된 ‘시장’에서 가해자를 지키는 자원으로 악용되고 있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성차별, 소수자 탄압, 약자혐오를 확산하는 몸부림, 이를 부추기는 정치가 사회 곳곳에서 퇴행을 만들고 있다. 사회적 연대를 경험하기보다 절망과 무력감만을 반복해서 마주한 세대는 고립된 채 각자 생존하고 있다.

더 나은 삶을 위한 싸움을 포기하지 않겠다. 할 만큼 하지 않았냐고 할 때 멈추지 않고 끝까지 가겠다. 권리를 특혜라고 이름 붙이며 박탈하려고 할 때 강고한 연대로 맞서겠다. 말할 자격, 피해자 될 자격을 묻는 위계를 거부하고 ‘자격 없는’ 여성들과 세상을 바꾸겠다. 여성과 소수자들이 변화의 주체로서 모여 분열된 삶을 통합하고 존엄성과 사회정의를 재구성하는 공론장을 열겠다. 다양한 조건과 삶의 불평등을 살피고, 서로 의지하고 돌볼 수 있는 관계, 평등하게 나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겠다. 고립되고 지쳐 주저앉는 대신 연결되고 기대어 불안정한 시대를 모험하겠다.

균열을 일으키는 용기가 무력해지지 않도록, 일상에 스며드는 변화가 풍요롭게 퍼지도록,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함께 만드는 새로운 시대를 환대하자.

2021. 10. 7.

한국성폭력상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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