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벌새’ 감독 김보라
2021년 올해의 양성평등문화상
올해의 양성평등문화콘텐츠 수상

 

김보라 영화 '벌새' 감독 ⓒ홍수형 기자
영화 ‘벌새’를 만든 감독 김보라. ⓒ홍수형 기자

2019년,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과 함께 전 세계 영화계가 주목한 우리나라 영화가 또 있었다. 국내외 영화제에서 60관왕을 기록하며 한국 독립영화의 역사를 새로 쓴 <벌새>가 그 주인공이다. 평단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을 뿐 아니라, 관객 수 14만명을 돌파하며 <워낭소리>, <똥파리>에 이은 괄목할 성과를 거뒀다.

<벌새>는 대한민국 성수대교 붕괴사고가 일어난 1994년을 배경으로, 중학생 은희의 아주 보편적이지만 가장 찬란한 이야기를 담았다. 폭력과 억압, 불안으로 마음 둘 곳 없이 살아가던 은희는 한문 강사 영지를 만나며 크고 작은 상처를 치유해나간다. 영지는 “아무것도 못 할 거 같은데 손가락은 움직일 수 있어”라며 무력해진 은희를 다독이고, 오빠에게 지속적인 폭력을 당하는 은희에게 “누구라도 널 때리면 어떻게든 맞서 싸워. 절대로 가만히 있지 마”라고 힘주어 말한다.

무엇보다 <벌새>는 여성의 서사를 잘 풀어냈다는 평을 받았다. 여성연대의 강력한 힘을 보여줌과 동시에 작품성과 흥행에도 큰 기록을 남긴 성과를 인정받으며 2021년 올해의 양성평등문화상 문화콘텐츠 부문 수상작이 됐다. 심사위원단은 “가부장제의 폭력성과 여성들 사이의 연대를 다룬 콘텐츠로 전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어 우리 사회 여성인권 신장과 성평등인식 제고에 크게 기여했다”라고 평했다. 차기작 <스펙트럼> 준비에 한창인 김보라 감독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상을 받을 때마다 정말 감사한 기분이 들어요. 제가 뭔가 기여했다는 느낌을 받게 되거든요. 30대 때 해보고 싶은 일 중 하나가, 세상을 바꾸는 활동가였어요. 20대 때는 페미니즘 단체에 있기도 했었고,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시위에 많이 참여했었죠. 그런데 귀국해서는 영화 준비 등으로 예전처럼 그러지 못했어요. 그런 부분에서 늘 부채감이 있었는데 이렇게 성평등에 기여했다는 상을 받아 뿌듯함이 큽니다. ‘집회에 나가고 활동가로 나서지 않더라도 영화로 말할 수도 있겠구나’ 싶었어요. 제가 가진 도구인 영화로 하나의 장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제 삶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끊임없이 관찰하고 삼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관찰해야겠지요.” 

영화 '벌새' 중 한 장면 ⓒ(주)엣나인필름<br>
영화 ‘벌새’ 중 한 장면 ⓒ(주)엣나인필름 

-<벌새>는 독립영화의 새 역사를 썼습니다. 감독에게는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나요?

“제게는 기적 같은 일이었어요. 예산이 작은 영화인데, 14만명을 기록하다니 너무 신기했죠. 배급사에서도 5만 명 정도가 최대치라고 예상을 했거든요. 어떠한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은 나 혼자만 잘해서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이번에 정말 깨달았어요. 스태프와 배우, 관객, 기자들까지 너무 감사하고, 참 기적 같은 일이었구나 싶어요. 영화를 진짜 좋아해서 쓴 게 느껴지는 리뷰가 많았어요. 어떤 기자는 <벌새> 리뷰를 쓰면서 오랜만에 일하지 않는 느낌이었다고 했는데, 그 말이 참 오래 기억에 남아요. 너무 많은 분들이 도와주셔서 사실 지금도 감사하다고 말해야 할 사람이 남아 있는 느낌이에요. 뭔가 항상 내가 충분히 감사를 표현 못 한, 그런 미적지근한 느낌이 있어서 최근 페이스북에 마음을 전하기도 했어요.”

-<벌새>를 만들면서 가장 고심했던 것이 무엇이었나요.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정치적인 어떤 결과물로 살아가죠. 내가 사는 동네라든가 내가 입는 옷, 내가 읽는 책, 내가 만나는 친구들 모두 다 정치적인 결과라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삶에 정치 아닌 게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제가 영화를 만들면 그런 것들이 드러날 것 같아요.

하지만 ‘뭐가 옳고 뭐가 그르다’는 방식은 지양하고 싶었어요. <벌새> 때도 가부장제를 그리긴 했지만 오빠와 아버지가 가해자처럼 안 보였으면 좋겠다 싶었거든요. 그게 저한테 제일 큰 이슈였어요. 단순히 그 둘을 가해자로 모는 건 되게 쉬워요. 하지만 어떤 이면을 보고 그들을 판단하지 않으면서 어떠한 현상을 드러내는 것이 저한테 되게 중요했어요. 앞으로도 흑과 백의 태도를 취하고 싶지는 않아요.

물론 저도 그런 함정에 빠질 때가 많은데 그러지 않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해요. 그러려면 스스로 깨어 있어야 하죠. 저도 바보 같은 실수를 하고 마음대로 판단을 하고 흑백 논리로 누군가를 볼 때도 있죠. 매일매일 가다듬고 수련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을 해요. 특히 창작하는 사람은 책임감이 너무 크니까.” 

영화 ‘벌새’ 포스터
영화 ‘벌새’ 포스터

-깨어 있기 위해 노력하는 게 쉽지는 않은 일이잖아요. 어떤 노력을 하시나요.

“일단은 날마다 명상을 해요. 스스로를 들여다보죠. 제가 상태가 좋지 않을 때 사람을 만나면 꼭 남을 판단하더라고요. 그래서 판단 분별이 심하게 올라오는 날은 ‘오늘 내가 안 행복했구나’ 하고 알아차리게 돼요. 상대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어떤 쓴 뿌리 같은 것이 저 사람을 자꾸 판단하게 했구나 싶어요. 내가 먼저 행복하고 내 마음이 평화로운 게 진짜 중요해요.

또 사람을 똑같이 바라보려고 노력해요. 예를 들어 한 사람을 만난다면, 제가 보는 건 그 사람의 하루의 반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죠. 근데 그 시간에 상대의 무례한 모습을 볼 때가 있잖아요. 나의 삶을 비춰봤을 때, 너무 힘들고 뭔가 자제할 수 없을 정도로 무너져 있었을 때 누군가한테 저런 모습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그래서 나쁜 사람이라고 결론짓는 게 아니라 그의 삶에 무언가가 있을지 상상하려고 합니다. 상상하는 것이 되게 중요한 것 같아요.

그리고 계속해서 겸손해져야겠다는 생각도 해요. 그 이유는 결국 나의 실수로부터 타인을 좀 이해하게 될 때가 있더라고요. 내가 가부장제를 많이 힘들어했지만 내 안의 가부장성은 없나 묻게 되는 것도 있어요. 어떻게 보면 스스로 옥죄는 거라고 느낄 수 있지만 오히려 제 안의 여유가 생겼기 때문에 가능한 것 같아요. 내가 더 이상 작은 존재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 순간, 더 크게 더 넓게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유명해지고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스스로를 비우는 일이 쉽진 않을 것 같아요. 또 삶은 환경이나 경험에 따라 변화하기도 합니다. <벌새>의 성공 이후 달라진 점이 있나요.

“영화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책임을 더 느끼고 있어요. 그래서 앞으로도 영화 만들 때 마음을 많이 정화해서 만들자는 생각을 해요. 왜냐하면 보고 나면 기분 나빠지는 영화들도 있거든요. 그래서 최대한 스스로를 많이 비우고 영화를 만들고 싶어요.

일단 힘을 빼려고 많이 노력해요. 만약 30대 초반에 갑자기 이런 일이 있었으면 우쭐했을 것 같기도 하거든요. 근데 제가 나이가 들어서 생긴 일이잖아요. 저는 <벌새>를 하면서 산전수전을 다 겪었어요. 그래서 그런지, 어깨에 힘이 들어가지는 않더라고요. 되게 감사했어요. 내가 원하는 게 안 될 때도 있다는 것 그리고 삶이 정말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도 간다는 것을 알게 됐죠.

<벌새>로 일어났던 많은 외부적인 일들은 이미 저를 떠난 것 같아요. 저한테 남은 것은 관객들의 사랑이에요. 관객들의 편지를 읽을 때마다 진짜 깊게 만난 느낌이었어요. 마음을 울려서 좋아하는 거는 진짜 다른 차원이거든요.”

-관객들이 많은 편지를 보냈다고 하셨는데, 편지를 다 읽었나요?

“다 읽었을 뿐만 아니라 여러 번 읽고 있어요. 심지어 박스에 다 모아놓고 힘이 들 때 읽는데, 그냥 편지만 봐도 힘이 나요. 내가 영화감독으로서 느낄 수 있는 궁극의 기쁨 같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1대 1로 소통하는 느낌이었는데, 다들 정말 절절하게 영혼을 담아 써주셨어요. 10페이지 넘게 써주신 분도 있었어요. 어떤 분은 ‘이상화하는 것처럼 보일 것 같아서 조심스럽다’고 그러셨는데, 제가 우려하는 지점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계시더라고요. 선물로 받은 책들도 제가 좋아할 것만 주셨는데, 어쩜 나랑 이렇게 성향이 비슷한 느낌일까 놀랐죠. 내 세포 하나하나에 남아서 제가 영화로 힘들 때마다 그 편지들을 떠올리며 힘을 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진심으로.” 

-최근 소녀시대 출신 배우 임윤아씨가 <벌새>의 배리어프리 버전 내레이션을 맡았어요.

“윤아씨를 보면 아이돌의 화려한 느낌보다는 건실한 청년 같은 느낌이에요. 회사에서 PT도 잘하고 굉장히 일을 열심히 할 것 같은 직장인의 느낌이 있어요. 영화 <엑시트>에서도 그렇게 느꼈고요. 그래서 이번에 같이 하면 좋겠다 싶었는데, 흔쾌히 맡아줘서 너무 고마웠어요. 내레이션도 차분하게 너무 잘해주셨어요.”

-여성 감독들이 두각을 나타내는 세계적인 흐름 속에 변화의 바람을 마주하는 의미가 남다를 것 같아요.

“자연스러운 변화의 바람 같아요. 끊기지 않고 더 가속화 되면 좋겠어요. 인권운동, 민주화운동 이런 흐름처럼 그냥 자연히 일어나야 될 흐름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아요. 사회가 계속해서 진화하고 진보하면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흐름인 거죠. 또 그런 흐름과 함께 남성 감독의 영화들도 훨씬 스펙트럼이 넓어지고 좀 더 열린 마음으로 작품을 만들게 되는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 같아요.” 

김보라 벌새 감독 ⓒ홍수형 기자
김보라 감독 ⓒ홍수형 기자

-인터뷰를 통해 소신 있는 발언으로 화제를 모았어요.

“너무 자연스러운 사고의 과정 끝에 하는 얘기인데 그게 화제가 되더라고요. 그래서 오히려 놀랐어요. 이렇게까지 화제가 될 필요가 있나, 좀 의아했죠. 제가 다닌 미국의 대학원이 진보적인 학교였어요. 시위를 많이 나갔는데, 특히 대절 버스를 타고 워싱턴에 자주 갔었죠. 이렇게 계속 교류하다 보니까 페미니즘이나 성소수자 이슈들이 체화되고 자연스러워졌어요. 그래서 유학 경험이 내게 큰 도움이 됐다고 생각해요. 또 백래시가 어떤 식으로 외국에서 발현됐는지 살펴보면 이것도 그냥 흐름이겠다는 생각은 들어요.”

-이 시대 여성 예술인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차별을 당한 경험이 사람을 더 아름답게 만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물론 차별을 당해서 더 안 좋게 변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을 잘 승화하면 타인 및 세계와의 관계를 깊게 고민하게 만든다고 생각해요. 저 역시도 여성으로 살면서 차별을 경험했죠. 그로 인해 위축되는 부분도 있지만, 세상을 정말 미세하게 만화경처럼 바라볼 수 있는 부분도 생긴다고 생각해요. 내 시야를 넓혀주는 건 사실이거든요.

여성들이 성소수자의 이슈에 더 개방적이잖아요. 그런 건 자기의 차별 경험으로 만날 수밖에 없는 지점이라고 생각해요. 차별을 경험한 사람이 필연적으로 타인에게 상처 주지 않고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기 위해 조심하는 흔적들을 보게 돼요. 특히 여성 감독 영화는 폭력을 제대로 전면에 드러내지 않아요. 불필요한 것을 보여주지 않고 누구도 힘들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결과물인 거죠. 살인이나 강간이나 폭력을 최대한 안 담거나 세련되게 보여주려고 하는 노력을 볼 때 그 힘을 느껴요. 차별을 경험했던 사람들의 힘, 그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힘이요.”

동국대학교 영화영상학과와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대학원 영화학과에서 수학한 김보라 감독은 2011년 단편영화 ‘리코더 시험’을 통해 가족들에게 별다른 애정을 받지 못하는 9살 은희의 모습을 섬세하게 담아냈다. ‘리코더 시험’의 은희가 어떻게 성장했을지 궁금해하는 관객의 질문에 김보라 감독은 ‘벌새’라는 장편으로 이야기를 확장하게 됐고, 그렇게 15살 은희의 모습이 탄생하게 됐다. 그는 “늦은 데뷔였고, 데뷔하기까지 고생을 많이 했는데 그로 인해 뭔가 통달하게 되는 지점이 있었다. 삶에서 어떤 일은 애쓴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라고 말했다.

-꿈은 무엇이었나요?

“심리상담사가 되려고 생각했었어요. 심리학 대학원에 갈까 고민을 많이 했죠. 남의 이야기 듣는 것을 굉장히 좋아하고 흥미로워하는 면이 있어요. 듣다 보면, 모든 이의 삶이 각자 신비로움과 역사를 갖고 있다고 느껴요. 그건 진짜 정말 거부할 수 없는 사실 같아요.”

-‘나에게 영화란?’이라는 질문에 답한다면?

“영혼을 담아 할 수 있는 일, 그러나 일처럼 하고 싶은 일이에요. 요새 주말엔 절대 일을 안 하고 직장인들이 주중에 출근하듯이 아침부터 오후 다섯 시까지만 일해요. 직장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오래 못 간다는 생각이 들어요. 예술혼도 중요한데 주말에까지 일하는 예술은 불태우고 싶지 않더라고요. 저의 저녁과 주말을 확보하지 않으면 무너진다는 걸 경험했기 때문에 이번 영화는 직장인처럼 예술혼을 불태우겠다, 이런 마음이에요. 내가 건강하지 않았을 때 얼마나 안 좋았는지 기억해 보면, 건강해야 글도 나오고 작품도 나오는 거죠.”

-차기작 <스펙트럼>은 외계생명체와 인간의 감각과 언어, 소통에 대한 SF영화로 알려졌어요. 기대가 큰데 부담은 없나요.

“남의 시선이 부담된다기보다는 제가 제 기준을 못 맞출까봐 부담돼요. <벌새> 때도 제 기준에 맞추려 많이 노력을 했는데 그렇다고 다 맞춘 건 아니었어요. <스펙트럼>은 워낙 규모가 큰 영화다 보니까 새로운 기준에 맞춰 해야 하는 부분이 있어요. 근데 남들이 좋다고 해도 내가 안 좋은 건 내가 알거든요. 스스로 만족하지 못한 영화는 상영관에 걸지도 못했어요. 내가 마음에 들어야 사람들도 마음에 들어 하더라고요. 내가 정말 ‘다 했다’라고 느낄 때까지 시나리오를 고쳐야 하는 단계가 남아 있어요.”

-목표가 있나요?

“<벌새>의 시나리오를 쓰고 어느 순간 울었던 기억이 있어요. 이 시나리오를 쓰고 뭔가 쏟아냈다는 느낌에 정화되듯이 그냥 울었어요. <스펙트럼>도 그 단계까지 갈 수 있으면 좋겠어요. 내 안의 뭔가가 일어나는 그 순간까지요. 지금 마흔한 살인데, 일을 즐겁게 하고 싶어요. 과거의 습관들을 버리고 배우는 마음으로 임하고, 좀 더 열린 마음으로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즐겁게 살고 싶어요. 그냥 그게 제 목표예요. 당장의 목표는 당연히 시나리오를 잘 써서 촬영까지 잘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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