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오명숙 한국여성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
여성 공학교육프로그램 첫 도입
이공계 여성인재 육성 선도
포용적 문화 확산 위해 총력

오명숙 한국여성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 ⓒ홍수형 기자
오명숙 한국여성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 ⓒ홍수형 기자

 

변화에 움츠려 들지 않고 끈기 있게 새 길을 내는 사람. 한국여성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이하 여성과총) 78개 단체, 8만 회원을 이끄는 오명숙 회장은 홍익대학교 최초의 공학전공 여성 교수로 국내 첫 여성 공학교육프로그램을 도입하며 공학계 여성 진출에 새 길을 열었다. 지난 1월 여성과총 11대 회장에 취임한 그는 산학연에서 쌓은 노하우를 기틀 삼아 임기 동안 ‘미래를 선도하는 여성과학기술인’이라는 비전을 실현하겠다고 밝혔다. 오 회장이 이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은 것이 바로 다양성과 포용성이다.

조직의 성과로 이어지는 포용성

“제가 포기하지 않고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비결 중 하나가 바로 조직의 다양성과 포용성이에요. 제가 미국 직장에 다니던 시절 태어난 지 100일도 되지 않은 첫째 아이를 봐줄 사람이 없어 발을 동동 구를 때 가장 먼저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이 바로 회사 동료들이었어요. 남자 동료들이 아내와 지인들에 수소문해 베이비시터를 찾아줘서 고비를 넘길 수 있었죠. 아직도 많은 여성 과학기술인들이 출산과 육아 때문에 경력단절을 겪잖아요. 육아 때문에 회사와 동료들의 눈치를 보며 일과 생활의 균형을 유지하는 일에 애를 먹는 여성들도 많고요. 잠재력이 충분한 여성 인재들이 주변 환경 탓에 역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국가적 손해입니다. 직원들이 최대의 역량을 끌어올리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바로 포용성이죠.”

최근 조직의 다양성에 대한 관심은 뜨겁다. 성별 다양성과 포용성의 가치는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의 중요한 요소로 부각되고 있다. 기업 내 다양성 확보는 혁신과 매출 증대로 이어진다는 연구결과도 속속 발표되고 있다. 맥킨지가 2020년 발표한 보고서 ‘다양성의 승리(Diversity wins : How inclusion matters)’에서는 15개국 1000개 대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기업 경영진의 성별 다양성 수준이 상위 25%인 기업들은 하위 25%인 기업들보다 평균 이상의 수익을 낼 가능성이 25%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보스턴컨설팅그룹이 2018년 실시한 연구에서도 인종과 성별 등 다양성이 높은 기업이 낮은 기업보다 혁신에 따른 수익이 19% 더 높았다.

우리나라 역시 이러한 변화에 발맞추고 있다. ‘자산 총액 2조원 이상인 상장기업은 이사회의 이사 전원을 특정 성(性)으로 구성하지 않아야 한다’는 자본시장법이 국회를 통과해 오는 8월 5일부터 시장에 적용된다. 

하지만 아직 국내에선 조직의 다양성 확보에만 관심이 그치는 경우가 많다. 오 회장은 “다양성이 변화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포용성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다양성이 ‘숫자’라면 ‘포용성’은 다양성이 효과적으로 실행되는 것을 의미한다. 다양한 사람들의 관점과 의견이 존중되며 서로의 다름이 제약 없이 공존할 수 있는 환경이 바로 포용적 문화라는 설명이다.

오 회장은 포용성이야말로 여성 과기인들이 경력단절을 겪지 않고 성장하며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힘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제도를 만드는 것보다 어려운 것이 인식 제고 아닌가. 오 회장은 우선 회원단체를 위한 강의부터 마련해 다양성과 포용성의 개념과 중요성에 대해 알리겠다는 계획이다.

“아직 다양성과 포용성에 대한 인식이 낮기 때문에 회원들에게 알리는 작업부터 시작할 겁니다. 실제 산업체 현장에서 구성원들의 인식 전환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구체적인 내용을 파악하는 것도 중요한 만큼 다양성과 포용성 확산에 앞장선 기업 사례를 공유하는 포럼도 준비 중입니다.” 

오명숙 한국여성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 ⓒ홍수형 기자
오명숙 한국여성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 ⓒ홍수형 기자

주위를 둘러볼 줄 알아야 리더

오 회장은 자신이 포용성의 수혜를 받은 만큼 후배들은 더 나은 환경에서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UC 버클리대를 졸업하고 미국 MIT 대학에서 화학공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미국 현지 산업체에서 10여년간 활약하며 소위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경기여고 3학년 말 미국에서 의사로 일하던 고모의 초청으로 그는 부모님까지 일곱 식구와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당시 집안에서는 의대로 진학하기를 원했으나 공대 취업률이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무엇보다 외우는 과목보다는 이해하는 공부가 좋아 화학공학을 전공으로 선택했다고 한다. 당시 화학공학과 정원 80여명 중 여학생은 그를 포함해 4명뿐이었다. 여성이자 아시안으로서 소수에 속했지만 다행히 차별은 경험하지 못했다고 했다. 주류로서 탄탄대로를 걷던 그는 한국에 돌아와서 여학생 교육에 관심을 갖게 됐다. 1994년 홍익대 최초의 여성 공학전공 교수로 부임한 그는 “여학생들이 점점 눈에 밟혔다”고 했다.

“성적이 우수한데도 남학생에 비해 자신감이 없고 야망도 크지 않은 여학생들을 보면서 늘 자신감이 부족하고 전공 분야에서의 자신의 미래를 구체적으로 그릴 수 없었던 학부 시절의 저를 볼 수 있었어요. 학생들에게 무엇을 해 줄 것인가 하는 고민을 하다 여학생 공학 프로그램을 시작하게 됐죠.”

오 회장이 2006년에 시작한 여학생 공학교육프로그램은 단순한 멘토링 프로그램을 뛰어넘어 공과대학을 바꾸는 프로그램으로 평가 받는다. 그는 “여학생들이 공과대학의 소수 그룹으로서 겪는 불이익, 때로는 무의식적이며 미세한 차별, 교수와 동료들의 지지 등에 대한 인식을 제고하고 이를 개선하려는 의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연구를 통해 이 같은 현상을 꾸준히 추적하고 여학생에게 동기부여가 되는 교육내용의 개발도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리더로 성장하길 원하는 후배와 여학생들에게 “주위를 둘러보라”고 권한다.

“먼저 주위에 관심을 갖고 무엇이 바뀌어야 하는지부터 고민해봐야 해요. 자신이 공감하는 이슈를 찾는 것부터 시작해 비전을 갖고, 지지하는 사람을 모으고, 행동으로 옮길 수 있어야 합니다. 리더는 주위를 돌아보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오 회장은 임기 동안 고경력 여성 과기인의 현황을 파악하고 이들의 경력을 활용하는 방안을 찾는 데도 관심을 기울일 계획이다. 경력단절 위기를 견디고 경력을 쌓으며 성과를 낸 많은 여성 과기인들이 40대 후반이 되면 퇴직의 문턱에 서는 경우가 많다. 제2의 인생을 꿈꾸지만 두 번째 커리어에서 이전 직장보다 훨씬 낮은 임금을 받거나 원하는 직장을 찾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오 회장은 이 문제를 산업기술인력지원위원회를 신설해 관련 논의를 심화하기로 했다.

“여성 과기인을 발굴하고 육성하고 지원하는 것이 여성과총의 역할입니다. 변화가 비록 미비한 것이라도, 회원들과 사회에 도움이 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한국여성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2003년 여성과학기술단체를 유기적으로 연합해 여성과학기술인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초대 나도선 회장을 비롯해 이혜숙, 김지영, 전길자, 최순자, 김명자, 백희영, 박세문, 유명희, 정희선 등 이공계 분야 주요 여성 리더들이 단체를 이끌었다. 4개 단체에서 출발한 여성과총은 19년 만에 76개 단체 8만 회원이 참여하는 연합회로 성장했다.

오명숙 회장이 이끄는 11대 회장단에는 강선미 서경대 전자공학과 교수, 권오남 서울대 수학교육과 교수, 민무숙 제주여성가족연구원 원장, 박정희 서울대 의류학과 교수, 백란 호남대 컴퓨터공학과 교수, 윤석완 한국여자의사회 회장, 이종은 연세대 의과대학 교수, 장현숙 제이드건축사사무소 대표이사, 정성희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산학협력교수, 조혜정 삼성물산 상무가 이름을 올렸다.

그동안 여성과총은 매년 연차대회와 학술대회, 과학기술 여성리더스포럼를 열어 여성 과학기술인의 역량 강화를 지원했고 미래인재상을 제정해 미래가 촉망되는 여성과학기술인을 발굴하고 그 공적을 널리 알리기 위해 힘썼다. 소외계층 청소년을 위한 과학진로 교육지원과 장학금 지급 등 사회공헌 사업도 꾸준히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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