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해한 드라마 읽기]
귀한 여성 주연물 반갑지만
일하는 여성의 삶·욕망 묘사 아쉬워
광고대행업계 현실 왜곡에
알맹이 없는 갈등·과장된 대사도

*이 글에는 드라마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JTBC 드라마 ‘대행사’에서 광고대행사 최초 여성 임원 고아인 역을 맡은 이보영.
JTBC 드라마 ‘대행사’에서 광고대행사 최초 여성 임원 고아인 역을 맡은 이보영.

취재 없이 쓰인 플롯, 무리한 연출, 과장된 대사. 성적표를 요약하자면 B급도 못 되는 C급이다. 대기업 인하우스 광고대행사에서 사상 최초 여성 임원이 된 주인공 고아인(이보영)이 사내 정치 암투극을 그린 ‘대행사’ 이야기다. 이 드라마는 광고대행사라는 특정한 업계 환경을 사실주의적으로 구현하고, 능력 있지만 내면의 상처도 있는 여성 노동자의 성장을 묘사한다는 기획 의도를 놓치면서 주연 배우들의 연기를 제외한 모든 면에서 무참히 실패했다.

1화 오프닝부터 트러블 메이커 고아인이 제작한 게임 광고는 동료 남성들의 심기를 거스른다. 백마 탄 왕자와 결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강도질하기 위해 기다린 여자가 왕자의 말을 벤 뒤 “왜, 다른 여자애들 같지 않아서 놀랐어?”란 내레이션으로 끝맺는 영상이다. 멍청한 남자들은 “이거 남혐 아니에요?”라며 분개하고, 실력과 논리로 무장한 아인이 남자들의 입을 다물게 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이렇게 유치하고 철 지난 연출로라도 현실과의 경계를 고의로 흐리면서 페미니즘-판타지적 세계관을 굳히려던 것인지 순간 흥미가 돋지만, 이후 회차들은 이 기대를 배반한다.

일례로, 아인의 의사 친구는 불면과 강박을 치료하기 위해 남자와 성관계를 맺으라는 해법을 두 번씩이나 강조하면서 “그 임자 없는 몸뚱아리 좀 굴려보라고” 얼토당토않은 충고를 한다. 11화에서 아인은 그 충고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듯 “그래, 죽으면 썩어 없어질 몸뚱이”라는 말을 남긴다. 직후 장면에는 시내 호텔을 전경으로 ‘아인의 가쁜 숨소리’ 사운드가 섞이더니, 천천히 달리는 아인이 카메라에 잡힌다. 꾸준히 섹스를 은유하는 척하다 방향을 튼 이 연출을 제작진은 유머러스하다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유머’는 아인이 일하는 동안 룸살롱에서 여자를 끼고 접대받는 경쟁자 남성들의 술자리에서나 통할 법한 저열한 유머다.

JTBC 드라마 ‘대행사’에서 광고대행사 최초 여성 임원 고아인 역을 맡은 이보영. ⓒJTBC 제공
JTBC 드라마 ‘대행사’에서 광고대행사 최초 여성 임원 고아인 역을 맡은 이보영. ⓒJTBC 제공
JTBC 드라마 ‘대행사’의 한 장면. ⓒJTBC 제공
JTBC 드라마 ‘대행사’의 한 장면. ⓒJTBC 제공

이런 장면들을 송출하며 여성의 ‘주체성’을 운운하는 태도는 패셔너블한 페미니즘의 탈을 쓰고 시청자를 기만하는 것에 가깝다. 이쯤 되면 어느 직업군을 다루든 상관없었을 오피스 드라마가 굳이 광고대행사로 무대를 좁힌 이유도, 여성 프로페셔널에게 꾸밈노동을 당연한 의무처럼 강요하는 악습을 남겨둔 유일한 업계이기 때문은 아닌지 의심이 든다. 실제로 화장하지 않는 카피라이터 원희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승진에서 번번이 미끄러졌다고 명시되기도 한다. “형식이 본질보다 중요할 때도 많다”는 핑계로 매회 이보영과 손나은을 데리고 인형놀이를 하는 제작진과, 상무가 된 아인에게 그룹사의 ‘얼굴’이 되어줄 것을 주문한 오너 일가의 사고방식에 큰 차이는 없어 보인다.

남성 감독과 남성 작가가 30년 전쯤 유행했을 것 같은 인물들을 내세워 주체적 섹시함, 주체적 꾸밈을 여성의 ‘주체성’이라 우기는 건 그저 우스울 뿐이다. 지금은 ‘섹스 앤 더 시티’가 처음 방영한 1998년도 아니고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가 유행했던 2006년도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압도적으로 뛰어난 업계 트렌드 리더이자 ‘돈에 미친 소시오패스’로 묘사되던 아인은 정작 중요한 순간마다 남들에게 한참 못 미치는 전략가로 그려진다. “아무한테나 이빨을 드러내는 미친년”처럼 보여도 실은 다 계산된 전술이었다는 게 아인의 컨셉이지만 그 이빨조차 너무 엉성하고 허접하며, 타인의 묘수를 예상하지 못하거나 쉽게 휘둘리는 모습은 아쉬움을 자아낸다. 현실의 일하는 여자들, 하다못해 카피라이터 은정이나 원희 정도만 되어도 드라마 속 아인보다는 똑똑할 텐데, 이건 마치 남성 제작진이 아무리 열심히 머리 굴려 ‘똑똑하고 진취적인 여자’를 상상해봤자 겨우 이 정도 그림밖에 그리지 못한다는 선고와도 같다.

결국 아인이 당면한 문제 해결에 실질적 도움이 되는 건 항상 선배 정석(장현성)이나 후배 병수(이창훈)다. 그들은 아인에게 없는 참을성을 지녔고, 억울한 사정도 있고, 기 센 여자들에게 조금 밀려도 수긍하고 조언해주는 ‘무해한’ 조력자 남성을 상징한다. 이렇게 현명하고 신중한 남자들은 남성 제작진의 눈이 시릴 정도로 노골적인 욕망이 투영된 페르소나로 보인다.

주연 인물의 설득력 있는 서사 구축에 실패하면서 자연히 현실의 광고대행업계도 모독당한다. 변변한 카피 한 번 등장하지 않는 데다, 중요한 PT나 회의 장면마다 정말 알고 싶은 광고사의 ‘일하는 방식’에 대한 묘사는 물 흐르듯 생략되고 남는 것은 진절머리 나게 유치한 기싸움뿐이기 때문이다. 부당한 구속수사 피해자를 데려다 국채를 횡령한 기업인의 이미지 제고를 위한 광고에 활용하고 아이를 잃은 엄마의 사연을 무의미하게 소비하는 것 외에 남은 디테일이 없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나 ‘미생’ 등 유사한 장르 명작들의 감동을 재연하고 싶었던 듯하지만, 힘주어 쓴 대사를 먼저 나열해놓고 알맹이 없는 갈등을 급조해 빈 부분을 메꿔 넣는 서사는 그 누구의 공감도 사지 못했다. 그간 여타 업종의 일하는 사람들을 다룬 드라마들이 난립할 때도 단독으로 주인공이 되어본 적은 없었던 직군이기에 이 재현의 실패는 더욱 안타깝다.

JTBC 드라마 ‘대행사’ 속 광고대행사 카피라이터인 워킹맘 조은정(전혜진), 꾸미지 않는 배원희(조은선). ⓒJTBC 제공
JTBC 드라마 ‘대행사’ 속 광고대행사 카피라이터인 워킹맘 조은정(전혜진), 꾸미지 않는 배원희(조은선). ⓒJTBC 제공

그나마 남은 희망은 이 드라마가 고아인과는 다른 상황에 처한 일하는 여자들의 삶에 약간의 시간을 할애한다는 점이다. 워킹맘 은정, 꾸미지 않는 원희, 계약직 비서 수정처럼 지금의 아인이 가진 것들을 아직 갖지 못한 후배 여성들의 서사가 드라마의 결핍을 간신히 메꾼다. 금방 자라날 아이의 성장을 지켜보지 못한다는 죄책감과, 광고 일이 ‘나라 구하는 일’도 아닌데 그만두라고 종용하는 남편에 대한 분노 사이에서 고민하는 은정은 특히 눈길을 끈다. 기실 아인의 역할은 그 자신의 쓸모만을 입증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런 후배들이 아인만큼의 자신감과 실력을 갖출 수 있도록 육성하고 그들 몫의 자리‘들’을 지키며 버텨주는 것까지도 포함한다.

‘대행사’는 분명 처음부터 끝까지 부족한 드라마다. 최근의 광고대행업계에 대한 취재 없이 오래된 편견만으로 자리를 채웠으며, 일하는 여성의 삶과 욕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남성 제작진의 한계가 아쉽고 답답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낮은 이해도를 가진 남성들조차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일하는 여성의 이야기를 간절히 바라는 소비자층이 두터워졌다는 점만은 증명된 것 같다.

어쩌면 ‘대행사’는 기계적으로라도 50 대 50의 비중을 맞추는 출발점으로 기록될지도 모른다. 시청자를 실망하게 하는 수준 낮은 ‘남성 주연’ 드라마가 몇 백 편 이상 양산되는 동안, 여성 주연의 드라마는 수적으로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나아질 기회조차 없었던 과거를 뒤로 하고 드디어 등장한 귀여운 졸작 말이다. 유치하고 단순했던 최초의 고아인을 뛰어넘는 제2, 제3의 고아인이 계속 나타나 드라마판을 뒤집는 자극이 되어주길 기대한다.

회사원. 영화 읽고 책 보고 글 쓰는 비건 페미니스트. 브런치: https://brunch.co.kr/@yooh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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