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해한 드라마 읽기]
김희애·문소리 필두로
강력한 여성들로 꾸린 성별 반전극
예리한 자본주의 비판 대신
코르셋·킬힐 키워드 집어넣은
진부한 ‘여성서사’ 아쉬워

넷플릭스 시리즈 ‘퀸메이커’ 스틸. ⓒ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 시리즈 ‘퀸메이커’ 스틸. ⓒ넷플릭스 제공

*이 글에는 드라마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최근 한국 드라마 업계의 안전한 성공 공식을 거칠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 있는 자들의 비겁한 유착을 없는 자들의 처절한 연대로 부순다. 그 ‘없는 자’들이 자본을 갖지 못했을 뿐 아니라 성별 권력을 갖지 못한 자들이라면 더욱 좋다.

김희애와 문소리를 필두로 해 서이숙·진경·김선영·김새벽 등 묵직한 배우들을 내세운 넷플릭스 시리즈 ‘퀸메이커’ 역시 이 공식을 충실히 따른다. 여기에 ‘퀸메이커’만의 탁월함이 있다면, 강력한 여성 인물만으로 극을 꾸려 ‘이갈리아의 딸들’을 연상시킬 만큼 판타지에 가까운 성비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드라마의 본격적인 긴장은 바닥부터 기어 올라와 대기업 오너 일가의 유능한 해결사가 된 황도희(김희애)가 오너의 사위에게 성폭행당한 여직원을 내치는 장면부터 시작된다. 자신이 믿어주지 않은 후배 여성의 자살에 큰 충격을 받은 황도희는 더 이상 옥상에서 떠밀리는 사람이 없게 하기 위해 애쓰다가 인권변호사 오경숙(문소리)과 조우하고, 너무나 다른 인생을 살아온 두 여자가 ‘더 좋은 세상’이라는 다소 밋밋하지만 낭만적인 이상을 위해 의기투합한다는 이야기다.

권력이 역사적으로 남성의 전유물이었기 때문에 권력을 잡으려는 (여)자는 필연적으로 남성을 모방하고 남성을 사랑하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면, 황도희와 오경숙은 결국 그 중간 과제에 실패하고 권력에 도전하는 대안적 방식을 제시하는 인물들이다. 그들이 내민 무기는 물론 이해와 공감과 애착에 기반한 정석적인 여성 연대다.

넷플릭스 시리즈 ‘퀸메이커’ 스틸. ⓒ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 시리즈 ‘퀸메이커’ 스틸. ⓒ넷플릭스 제공

‘옥상’이란 역린이 생긴 후 고인이 된 성폭력 피해자의 마지막을 상상하며 밑을 내려다보는 황도희의 표정은 너무 고통스러워서, 이것이 바로 공감이며 공감을 할 줄 아는 자는 본래 권력자가 되기 어렵다는 슬픈 선고가 내려지는 것만 같다. 10년간 오너의 충견으로 일했으면서도 빈자를 사람 취급하지 않는 ‘회장님의 방식’엔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할 때부터 그의 각성은 예고됐는지도 모른다. 결국 황도희는 사냥개와 떨어진 새 중 차라리 사냥당한 새가 되어 약한 자의 긍지를 지키기를 선택한다.

반면 오경숙은 등장부터 타인의 고통을 자기 것처럼 생각하는 이다. 싸움의 명분도 있고 본능적 감각도 있는데 기술이 없던 투사와, ‘안정제가 통하지 않는’ 빈자의 현실을 모르던 쇼 비즈니스 전문가가 서로를 채워주며 목표한 권력의 정점에 도달하는 과정은 정통 로맨스를 방불케 한다.

거기에 대여한 권력에 눈먼 여자, 동료 여성에 대한 공감을 포기하고 권력자 남성의 사랑놀음에 동참하는 여자, 전통적인 남성 악인의 롤을 흉내 내며 사다리를 걷어차는 여자 등 역시 성별이 바뀐 악인들이 얹어진다.

넷플릭스 시리즈 ‘퀸메이커’ 스틸. ⓒ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 시리즈 ‘퀸메이커’ 스틸. ⓒ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 시리즈 ‘퀸메이커’ 스틸. ⓒ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 시리즈 ‘퀸메이커’ 스틸. ⓒ넷플릭스 제공

고위 정치인이나 기업가가 여성이란 점을 유난스럽게 강조하지 않고 오히려 힘을 빼 ‘당연하게’ 그 자리에 있는 사람으로 보이게 한 것은 분명 놀라운 진보다. 하지만 은성백화점 여성 노동자들이나 재래시장의 상인 등 권력의 하층부를 그리는 데에는 상층부의 묘사만큼 공들이지 않아, 주요 인물의 성비 반전을 넘어 나아가지 못했다는 점이 한계로 남는다.

게다가 극적 효과를 위해 고인이 된 성폭력 피해 여성의 동의 없이 전 국민 앞에서 실명을 노출하는 경솔함, 딥페이크를 악용한 성범죄를 가볍게 소비하고, ‘가스라이팅’이나 ‘성적 학대’라는 용어들이 남용되면서 불러오는 실망은 덤이다. 제작진이 한국 정치의 미흡한 면면에 대한 사실적 구현을 의도했다 하더라도, 이제 현실의 사실적 재연 이상으로 나아갈 때 아닌가.

능력 있는 여성은 외모까지 완벽하게 자기 관리해야 한다는 낡은 믿음이라도 멋지게 파훼되길 바랐건만, 겨우 코르셋을 벗어던지는 동작으로 간단한 카타르시스를 노린 부분은 드라마를 통틀어 최고로 유치한 장면으로 기능하고 만다. 탈코르셋이란 시대정신에 편승하기 위해 먼저 몇백 년 전 유행했던 코르셋을 입혀야만 하는 게, 여성의 의지와 자존감을 나타내기 위해 매일 킬힐을 신겨야만 하는 게 아직은 벗어날 수 없는 시대적 한계일까.

이왕 판타지가 되겠다면, 탈코르셋을 그렇게 직접적으로 선언해야만 했다면, 기왕 오랫동안 외모 평가의 덫에 걸려있던 능력 있는 여배우들을 대거 기용한 참이라면, 여성 정치인과 기업인이 ‘아주 당연하게’ 화장하지 않는 세계관을 상상해 봐도 좋지 않았을까.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느껴지는 것은, 최근의 트렌디한 여성서사 드라마들이 대부분 그러했듯 ‘퀸메이커’ 역시 언더독 여성서사의 깊이를 고민하기보단 그 여성서사가 ‘잘 팔린다’는 사실에만 집중한 듯해 아쉬움이 남기 때문이다. 결국 ‘퀸메이커’가 이뤄낸 것은 성별 반전된 자본가 개인에 대한 복수에 불과하다. 여성을 치장시키고, 저임금 노동에 영원히 머무르게 하는 자본주의에 대한 시원한 반발 없이 현실 그대로의 모습에 천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진부한 드라마를 옹호하고 싶은 것은 그간 방송가에서 이만한 작품이라도 찾아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눈에 띄는 헤테로 로맨스 없이 온통 서로에게 애틋한 눈길을 보내는 원숙한 여성 배우들의 호연으로 서사적 구멍을 메꾸려는 시도만은 성공적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회사원. 영화 읽고 책 보고 글 쓰는 비건 페미니스트. 브런치: https://brunch.co.kr/@yooh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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