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한 장면. ⓒ메가박스(주)플러스엠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한 장면. ⓒ메가박스(주)플러스엠

서울을 떠난 후 서울발 뉴스들이 무덤덤해진 지도 오래다. 종부세가 어떻고 양도세가 어떻고… 애초에 서울을 떠난 것도 경쟁에서 이길 자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싸우다 만신창이가 되느니 일찍 포기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여전히 무주택자 신세이지만 그래도 서울이라면 50억원도 받을 만큼 넓은 맹지 텃밭이 있고 그곳엔 서울에서는 상상도 못할 각종 산나물도 봄, 여름, 가을 자라난다. 아내한테 그 얘기를 했더니 그런 걸 “정신승리”라고 한다며 눈을 흘긴다.

임순례 감독의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보았다. 20대 중후반의 주인공 혜원이 서울 생활을 떠나 땅과 자연에서 수확한 재료로 요리하며 몸과 마음을 치유한다는 내용이었다.

사실 전원에서의 삶이 마냥 그렇게 목가적일 수만은 없다. 영화에서도 폭우에 쓰러진 벼와 과수원의 낙과를 가볍게 터치하지만, 징그러운 짐승과 벌레들, 상상을 초월한 무더위, 돌아서기만 해도 자라나는 잡초, 죽어라 일해도 벗어나지 못하는 가난의 굴레 따위는 시골의 삶이 꿈이 아니라 현실임을 말해준다.

아내는 지금도 벌을 무서워하고 개구리가 폴짝 뛰면 진저리를 치고 비명부터 지른다. 계약할 때만 해도, 짬을 내 가까운 명지천에서 멱도 감고 물고기도 잡을 꿈을 꾸었지만 일주일에 하루만 찾다 보니 하루 종일 김을 매고 잡초와 싸우다 기진한 채 집에 돌아가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말이 되면 어김없이 달려오는 이유는 혜원처럼 이곳에 와서 치유를 받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텃밭이 반려동물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틈틈이 산을 찾는 것도 텃밭의 흙을 만지는 것도, 자연과 함께하려는 마음의 표현이겠지만 두 행위는 근본적으로 의미가 다르다. 전자의 경우 자연에게 우리는 스쳐 지나가는 손님일 뿐이지만 후자는 우리가 엄연히 주인이므로 주인답게 텃밭을 돌봐줘야 한다. 때가 되면 먹을 음식과 마실 물을 주고, 털을 깎아주듯 잡초를 제거해야 한다. 농작물도 농사꾼의 발소리를 들으며 자라고 주인에게 버림받으면 반려동물처럼 야생으로 돌아가고 만다. 반려동물과의 행복한 동행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듯 텃밭을 가꾸며 치러야 하는 노동 또한 행복을 위한 대가인 셈이다.

혜원은 배가 고파서 내려왔다고 했다. 인스턴트 음식으로는 허기를 채울 수 없었다며. 혜원이 자신과 친구들을 위해 정성껏 음식을 준비하는 이유일 것이다. 내가 아내를 위해 상을 차리는 이유도 다르지 않다. 요리는 단순히 생계를 위한 도구가 아니다. 자본주의 경제를 위한 부수적 기능도 아니다. 그 자체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행위다. 사람을 살리는 일이자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도구가 아닌가. 혜원의 모가 말했듯, “요리는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다.

“그런데 어떻게 저렇게 젊은 사람이 20년 주부인 나보다 요리를 잘하고 10여 년 경력의 텃밭지기보다 농사일을 잘 알지?”

내가 한마디 하자 아내가 또 영화 갖고 시비 건다며 조용히 감상이나 하란다.

저기요, 혜원 씨, 씨감자를 그렇게 얕게 심으면 나중에 감자가 모조리 땅 밖으로 올라와요. 고구마는 아래로 달리고 감자는 위로 열린다는 말도 몰라요? 그리고요, 혜원 씨가 주운 밤은 산밤이 아니라 옥광이나 대범 같은 개량종일 겁니다. 산밤은 그렇게 크지도 않고 윤기가 나지도 않아요.

부러운 마음에 투덜대보지만 아무튼 내 꿈같은 영화. 

조영학/ 번역가, 『상차리는 남자! 상남자!』 저자
조영학/ 번역가, 『상차리는 남자! 상남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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