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여성인권선언서 ‘여권통문’
1898년 9월 1일 여성 300여명
교육권·직업권·참정권 외쳐

한국 최초의 여성인권 선언문 ‘여권통문’
한국 최초의 여성인권 선언문 ‘여권통문’

9월 1일은 한국 최초의 여성인권선언서 ‘여권통문’이 발표된 날이다. 정부는 여권통문의 날을 법정 기념일로 제정하고 1일부터 7일까지 ‘양성평등주간’으로 기념하고 있다. 당시 여성들이 교육권·직업권·참정권을 요구한 ‘여권통문’은 새 세상을 연 한국 여성운동의 ‘뿌리’다. 여권통문은 125년 전 과거의 선언이지만, 강력한 백래시(반발행동)에 부딪치며 성평등의 중요성과 가치를 강조해야만 하는 현실에 여전히 그 의미는 유효하다. 

‘여권통문’은 1898년 9월 1일에 선포된 한국 최초의 여성인권선언서다. 서울 북촌의 양반여성들 300여명이 모여 이소사, 김소사의 이름으로 ‘여학교설시통문[여권통문]’을 발표했다. 소사는 나이 든 기혼 여성을 뜻한다. 여성계의 꾸준한 노력으로 여권통문이 발표된 9월 1일이 법정기념일인 ‘여권통문의 날’로 지정됐다. 

당시 <황성신문>, <독립신문>이 전문을 보도해 기록이 남아있다. 이 통문에서 여성들은 평등사상을 기반으로 참정권, 직업권, 교육권 등 근대적 권리를 주장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교육받을 권리였다. 

여권통문은 선언에서 그치지 않았다. 이들은 ‘여아 교육은 국가의 책무’라는 생각 하나로, 머리를 풀고 고종에게 상소를 올리며 관립여학교 설립을 요구하기도 했다.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자,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단체인 ‘찬양회(기르는 모임)’를 설립해 1899년 2월 순성여학교를 개교했다. 이는 한국여성에 의해 설립된 최초의 사립여학교였다. 

여권통문 기념 표석. ⓒ곽성경 여성신문 사진기자
여권통문 기념 표석. ⓒ곽성경 여성신문 사진기자

100여년이 흘렀으나 아직도 선배 여성들의 용기 있는 결단과 실천은 제 역사를 찾지 못하고 있다. 

기계형 젠더뮤지엄코리아 관장은 “여성을 둘러싼 현실이 많이 나아졌다곤 하지만, 가부장적 문화나 토대는 바뀌지 않았고 아직 (해결되기는) 요원한 것 같다”며 “125년 전 여성들이 외친 것도 다름 아니라 ‘인간이고 싶다’는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지난 2019년 여성들이 찬양회와 순성여학교 설립을 처음 결의한 장소인 당시 홍문섯골 사립학교 자리(현 신한은행 백년관)에 표석이 설치돼 그 의미를 기릴 수 있게 됐지만, 아직도 학교를 처음 세운 곳이 어디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이같은 ‘틈’을 ‘여성주의적 상상력’으로 메우는 것이 후대 여성들의 사명이라고 덧붙였다.

기 관장은 “(여권통문 발표는) 알려지지 않고 공식적인 역사에 쓰이지 않은 여성들의 삶을 연구하고, 해석하고, 공백을 상상력으로 채워 새로운 역사를 쓰게 하는 전환점이 된 사건”이라며 “1919년 2월, 3.1운동이 일어나기도 전에 ‘대한독립여자선언서’를 작성한 8명의 여성들이 있다. 400여명으로 알려진 찬양회 회원들이 그 과정에서 가교 역할로 참여했을 수 있는데 (이들에 대해 연구된 바가 전혀 없다.) 그 공백은 아직도 연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7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서 3차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 ‘불편한 용기’가 열려 참가자들이 피해자의 성별에 따른 차별 없는 동등한 수사와 처벌을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지난 2018년 7월7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서 3차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 ‘불편한 용기’가 열려 참가자들이 피해자의 성별에 따른 차별 없는 동등한 수사와 처벌을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이른바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한국 여성운동은 크게 결집하지 못하고 동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전문가들은 그 원인으로 끊겨버린 한국 여성사의 ‘맥’을 꼽았다.

정현주 여성역사미래 상임대표는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너무 모른다. 우리나라 여성운동은 대한제국 때 시작됐는데, 1960년대 이후 서구 중심의 운동이 들어오면서 우리 역사는 별로 소개가 안 됐다”며 “여성운동이 시들해졌다고 하는데, ‘뿌리’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제는 역사 속 여성 되돌아보기를 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역사를 잊은 자에게 미래는 없다. 찾아내 큰 소리로 알리지 않으면 묻히고 마는 여성들의 역사는 더 그렇다. 선배 여성들의 기개를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미래의 퇴행을 막기 위해 더 큰 노력이 필요한 이유다. 

정 대표는 “(역사)연구자들의 연구를 대중화하고 교과서에 싣는 등 변화가 이뤄져야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대접받는 평등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 싶다”며 “여성사박물관이 2025년에 세워진다고 한다. 한국적 페미니즘의 역사를 새롭게 쓰게 된다면, 그 역사의 정점에 서는 게 ‘여권통문’일 거다. 그 이후 여성운동이 어떻게 전개됐는지 정리하면 우리의 앞길도 좀 보이지 않을까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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