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뮤지컬 스타 연출가
공연계 성평등 다양성 확대 기여
창작뮤지컬에 각별한 애정
내년 65세 여성킬러 원톱물 공개
“이젠 후배들에 길 터 주고
제작자로 나아갈 계획”

한국 뮤지컬의 ‘성평등 역사’를 말할 때 이지나를 빼놓을 수 없다. 23년간 연출가로 일하면서 성별 고정관념을 깨고 공연계의 다양성 확대에 기여한 공로로 2023년 ‘올해의 양성평등문화인상’을 받았다. ⓒ이지나 연출가 제공
한국 뮤지컬의 ‘성평등 역사’를 말할 때 이지나를 빼놓을 수 없다. 23년간 연출가로 일하면서 성별 고정관념을 깨고 공연계의 다양성 확대에 기여한 공로로 2023년 ‘올해의 양성평등문화인상’을 받았다. ⓒ이지나 연출가 제공

“뮤지컬계 ‘대모’는 무슨. 전 ‘마이너’예요. 가시밭길을 걸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거침없는 말투, 까랑까랑한 웃음소리. 이지나 연출가의 전매특허다. 기자와 인사를 나누자마자 부리부리한 눈을 빛내며 말했다. “제가 입에 발린 말을 잘 안 해요. 편집 잘해주세요. 안티 안 생기게. 하하하.”

‘록키호러픽쳐쇼’, ‘헤드윅’ 등을 흥행시키며 ‘공연계 미다스의 손’으로 떠오른 연출가. 찬사도 비난도 한 몸에 받으며 20여 년째 늘 한국 뮤지컬의 중심에 선 연출가. 흥행 문법에 통달했으면서도 개성 강한 창작뮤지컬을 추구하는, ‘비주류’를 자처하는 연출가. 이젠 후배들에게 길을 터 주고 제작자로서 ‘든든한 뒷배’가 되겠다는 그는 여전히 다음 행보가 궁금해지는 사람이다. 2023년 ‘올해의 양성평등문화인상’ 주인공 이지나 연출가를 지난 28일 만났다.

이지나 연출은 여성의 성 담론을 다룬 여성주의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를 2000년 국내에 소개하고 12년간 공연을 추진해 왔다.  ⓒ페이지원 제공
이지나 연출은 여성의 성 담론을 다룬 여성주의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를 2000년 국내에 소개하고 12년간 공연을 추진해 왔다. ⓒ페이지원 제공
이지나 연출은 수년간 성별을 넘나드는 ‘젠더 프리 캐스팅’을 해왔다. 사진은 연극 ‘아마데우스’에서 살리에리로 출연한 배우 차지연.  ⓒ페이지원 제공
이지나 연출은 수년간 성별을 넘나드는 ‘젠더 프리 캐스팅’을 해왔다. 사진은 연극 ‘아마데우스’에서 살리에리로 출연한 배우 차지연. ⓒ페이지원 제공
뮤지컬 ‘광화문 연가’에서도 젠더프리 캐스팅을 시도했다. 월하 역을 맡은 배우 김호영, 차지연, 김성규. ⓒCJ ENM 제공
뮤지컬 ‘광화문 연가’에서도 젠더프리 캐스팅을 시도했다. 월하 역을 맡은 배우 김호영, 차지연, 김성규. ⓒCJ ENM 제공

한국 뮤지컬의 ‘성평등 역사’를 말할 때 이지나를 빼놓을 수 없다. 여성의 성 담론을 다룬 여성주의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를 2000년 국내에 소개하고 12년간 공연을 추진해 왔다. 연출 데뷔작 뮤지컬 ‘록키 호러쇼’를 포함해 연극 ‘거미 여인의 키스’, 뮤지컬 ‘헤드윅’, ‘라카지’ 등 퀴어 문제를 다룬 공연을 다수 선보였다. 2015년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헤롯왕역으로 배우 김영주를 캐스팅하며 국내 뮤지컬계 최초로 젠더 프리 캐스팅을 시도, ‘더 데빌’, ‘광화문 연가’,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 ‘아마데우스’ 등에서 꾸준히 성별을 넘나드는 캐스팅을 진행했다. 이처럼 성별 고정관념을 깨고 공연계의 다양성 확대에 기여한 공로로 ‘올해의 양성평등문화인상’을 받았다.

‘올해의 양성평등문화인상’ 수상 소식을 들은 그는 “제가 자격이 있나 싶다”고 했다. “양성평등은 너무 당연한 가치인데 저도 어쩔 수 없이 흥행 때문에 타협하는 부분이 많거든요. 목구멍이 포도청이니까. 옳다는 걸 알아도 돈과 직결될 땐 평등을 추구하기가 쉽지 않아요.”

그가 여성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은 호오가 갈리지만, ‘여성의 강인함’을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해온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고통을 겪어야 강해져요. 예쁘기만 한, 사랑받는 캐릭터보다 ‘서편제’ 송화처럼 역경을 이겨내고 쟁취하는 캐릭터가 좋고요. 또 ‘잃어버린 얼굴 1895’, ‘서편제’ 등 여성 원톱 작품을 하려고 노력해 왔어요. 그런데 창작뮤지컬은 여성 원톱물이 여전히 많지 않고 반응도 아주 좋진 않아서 안타까워요.”

‘여성서사, 다양한 여성 캐릭터를 원하는 관객들이 늘지 않았느냐’고 묻자 “아니다. 여전히 여자도 남자를, 남자도 남자를 보러 간다”고 잘라 말했다. 냉정한 분석도 덧붙였다. “일 년에 뮤지컬 한 편 보는 사람들은 그런 데 신경 쓸 여유가 없어요. 롯데월드 가는 기분으로 선택하는데, 오락으로 즐기는 사람에게 철학이나 페미니즘 이야기는 공허하죠.”

주관이 뚜렷하고, 꽤 신랄한 언어를 구사하는 창작자다. 몇몇 대극장 창작뮤지컬 작품들을 거론하며 그가 말했다. “재미없어요! 전 저런 걸 안 만들어야지 하는 생각으로 23년째 하고 있어요. 모두가 좋아하는 것, 유행을 좋아하지 않아요.

제가 많은 라이선스 뮤지컬들을 성공시켰죠. ‘그리스’, ‘헤드윅’,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에비타’, ‘인 더 하이츠’... 다 제가 선택한 게 아니라 연출자로 고용된 작품들이에요. 제 창작뮤지컬들은 ‘마이너’예요. ‘서편제’는 12년 만에 성공했어요. ‘곤 투모로우’는 가시밭길을 걷고 있죠. 하지만 제 작품을 좋아하는 매니아들이 있지요. 작아도 독창적인 ‘디자이너 브랜드’로 남고 싶어요.”

이지나 연출의 뮤지컬 ‘서편제’ 공연 사진. 소리꾼 이자람, 배우 차지연 등이 참여해 화제에 올랐다. ⓒ페이지원 제공
이지나 연출의 뮤지컬 ‘서편제’ 공연 사진. 소리꾼 이자람, 배우 차지연 등이 참여해 화제에 올랐다. ⓒ페이지원 제공
이지나 연출의 총체극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 작곡가 정재일, 발레리나 김주원, 소리꾼 이자람, 뮤지컬배우 마이클 리, 현대무용가 김보라 등 한 작품에서 만나기 쉽지 않은 예술가들이 모여 주목받았다. ⓒ프로스랩 제공
이지나 연출의 총체극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 작곡가 정재일, 발레리나 김주원, 소리꾼 이자람, 뮤지컬배우 마이클 리, 현대무용가 김보라 등 한 작품에서 만나기 쉽지 않은 예술가들이 모여 주목받았다. ⓒ프로스랩 제공
이지나 연출의 뮤지컬 ‘곤 투모로우’의 한 장면. ⓒ페이지원 제공
이지나 연출의 뮤지컬 ‘곤 투모로우’의 한 장면. ⓒ페이지원 제공

이력이 독특하다. 조연출을 거쳐 연출로 데뷔하는 업계 관행과 달리 ‘배우 출신’ 연출가다. 중앙대에서 연기를 전공하고 10여 년간 연극·뮤지컬 배우로 활동했다. 배우 김희애가 그의 동문이다. 그러다가 영국 미들섹스 대학원에서 연출학을 공부하고 2001년 연출가로 데뷔했다.

뮤지컬 업계는 프리랜서들의 치열한 경쟁무대다. 잘하는 사람에겐 일이 몰리지만 그렇지 않으면 하루아침에 일이 끊긴다. 자기 계발과 체력 관리는 필수다. 본인은 “관리 안 한다”며 손사래를 쳤지만, 이지나 연출은 옛날부터 다방면에 관심 많고 트렌드를 잘 읽기로 유명했다. 강력한 카리스마, 직설적인 성격도 유명했다. 원래 ‘센 여자’인 걸 어쩌나.

“난데없이 세상이 원하는 캐릭터로 변하는 거? 안 되더라고요. 인간이 어디 변하나. 하하하! 자기표현 확실하고, 직설적이고, 독설가에, 여성이라는 게 늘 저의 약점이었죠. 욕도 먹었는데 그럴수록 더 화가 많고 무서운 사람처럼 굴었어요. 남들이 오해해도 그런가 보다 했죠. 아이러니하게도 그 때문에 버틸 수 있었고요.”

대구에서 10형제 중 9번째로 태어났다. 자식들 예술 교육에 열과 성을 쏟은 모친 덕에 어릴 적부터 피아노, 플루트, 피겨스케이팅, 동화구연 등을 배웠다. “중간에 지쳐서 다 관뒀어요. ‘무용 하라고 하면 집을 나가겠다’고 우겼죠. 어머니도 제 고집을 못 꺾었어요. 그때부터 한 분야를 파는 사람은 못 되겠다 싶었어요. 여러 분야를 두루 알아야 하는 뮤지컬 연출가가 됐죠.”

연출은 “먹고 살아야 하니” 택한 길이기도 하다. “싫다고 힘들다고 안 할 수 없었어요. 부모가 준 유산을 누리며 살아가도 충분한 ‘문화 한량’이 아니니까! 내 직업이 있는 사람으로 살아야 하니까! 그래서 순수예술은 못 했죠. 하하하.”

‘이지나의 리더십’을 스스로 어떻게 평가할까. “맹장(猛將)이죠. 덕장(德將)은 아니고. (평가가 박하시네요?) 냉정한 거예요. 자기 자신에게 너그러운 것만큼 초라한 게 없어요. 지장(智將)이 되려고 노력했지만 덕장은 영원히 되지 못할 것 같아요. (일본 전국시대의 맹장) 오다 노부나가 정도죠. 하하.”

최악의 연출가는 “자기가 뭘 원하는지 모르면서 디자이너에게 자꾸 주문하기만 하는 연출가”라고 봤다. “안개 속에서도 사람들을 끌고 가야 하는 게 연출이에요. 내가 틀려도 확신을 갖고 가야 해요. 이 사람도 맞다, 저 사람도 맞다 하면서 황희 정승처럼 굴면 안 돼요.

저 호불호 갈리는 연출가 맞아요. 김문정 음악감독은 ‘이지나랑 작업하기 싫다’고 해요. 너무 힘들대요. 근데 결과를 보면 뿌듯하니까 계속 함께하게 된대. 하하하. ‘이걸 만들려고 그렇게 고생했냐’며 저와 원수가 된 사람들도 있죠. 슬픈 이야기지만 언제부턴가 멘토가 없어졌어요. 반면교사만 있어요. ‘저렇게까지 추해지진 않아야지’ 하면서 살아요.”

어떤 사람들과 일하고 싶을까. “천재는 많은데 품위 있는 사람은 드물어요. 제가 그렇게 품위 있는 사람이 못 되다 보니 동료가 그랬으면 좋겠어요. 실력은 기본이죠. 특히 배우는 연기 못하면 아무리 도덕군자여도 싫고요. 배우라는 ‘관종’ 직업을 택한 이상 품위가 있어야죠. 돈이 전부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예의, 작품에 대한 책임감을 갖고, 작품을 신중하게 고르고, 관객에게 어떠한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이요.”

가수 겸 배우 아이유에게 ‘러브콜’도 보냈다. “대중 스타로서 가장 옳고 품위 있는 선택을 해나가는 분 같아요. 작품을 고르는 기준도 괜찮은 것 같고, 아이유가 해준다면 아이유를 위한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연출가를 꿈꾸는 후배들에게는 냉정하지만 뼈 있는 조언을 전했다. “굉장히 가난한 직업이라는 걸 분명히 알고 시작하세요. 서러운 직업이고요. 우리는 스타가 돋보이게 하려고 밑에서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이지, 우리가 스타가 될 생각을 하면 안 돼요. 잘 되면 배우 탓이고 망하면 다 연출 탓입니다. 그만큼 큰 책임을 지는 자리죠. 불행하게도 재능이 없으면 오래오래 영원히 가난한 직업이고요. 실력이 없는데 하고 싶어서 연출을 하면 남이 피곤해요. 얇고 넓게 알아야 하고요. 대본, 음악, 캐릭터, 디자인, 의상 등 모든 분야의 균형, 조화를 이룰 수 있어야죠. 성격도 모나면 안 되고, 대화도 잘 통해야 하고, 체력도 중요해요. 잠이 많으면 연출 못 해요. 누우면 오늘 내가 만든 장면이 하나하나 다 떠오르고, 실수했나 안 했나 생각해야 하는데, 잠이 와요?”

뮤지컬 연출 업무는 노동 강도에 비해 돈은 안 되는 열악한 일자리라고 그는 거듭 강조했다. “어느 분야에서 ‘탑’ 소리를 들으면 잘 살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전 혼자 먹고살 만큼만 번다니까요. 제가 결혼해서 애를 키웠다면 이 돈으로 못 살죠. (조명, 소품, 세트 등을 설치하고 옮기는) 무대 크루가 다 여자들로 바뀌고 있어요. 성평등 확대로만 해석할 수가 없어요. 남자들은 돈이 안 되니까 빠지는 거예요. 이 업계가 그만큼 영세하다는 거죠. (톱배우 출연료 비중이 커질수록 실질적 제작비용은 줄어드는) ‘스타 시스템’의 한계이기도 해요. 스탭들은 남은 돈을 갖고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거든요. 더욱 다양한 작품이 나오고, 배우가 아니라 작품을 보러 간다는 관객들이 늘어야 바뀔 거라고 봐요.”

요즘 이지나 연출은 굵직한 차기작 준비로 분주하다. 오는 11월 서울예술단 창작가무극 ‘순신’으로 관객들과 만난다. 충무공 이순신의 삶과 고뇌를 그린 작품이다. ‘한산’, ‘명량’, ‘노량’ 등 주요 해전 장면은 판소리로 풀어내고, 입체적인 영상과 무대효과로 스펙터클한 장면을 연출한다. 김문정 작곡, 이자람 작창에 오필영 무대디자이너가 함께한다.

또 제작사 PAGE1과 함께 구병모 소설 『파과』를 2024년 3월께 뮤지컬로 선보인다. 65세 여성 킬러의 이야기를 다룬 여성 원톱물이다. 혜경궁 홍씨와 사도세자의 이야기도 뮤지컬화를 검토 중이다.

연출가를 넘어 제작자로 변신할 계획도 들려줬다. “흥행 걱정보다 예술성 있고 개성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기존 작품들은 제자들에게 하나씩 물려주고, 전 재미있는 신작을 개발하고 싶어요. 이미 빚도 많고 투자받기도 쉽지 않을 것 같아서 작은 걸로요. 하하하.”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