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창선의 문화이야기]
언제나 남성이었던 ‘위대한 음악가’

마리아 피터스 감독의 영화 ‘더 컨덕터’는 뉴욕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최초로 지휘한 여성지휘자 안토니아 브리코의 실화를 담은 작품이다. 여성은 지휘자로 인정하지 않던 시절 간절하게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되고 싶었던 브리코는 이렇게 말한다. “슈바이처는 음악을 다음 생으로 미룰 만큼 미쳤지만 전 음악을 위해 이번 생을 바칠 만큼 미쳤어요. 선생님이 도와주시든 안 도와주시든 전 지휘자가 될 거예요.” 브리코의 선생이었던 카를 무크는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한다. “백 명의 남자 앞에 한 명의 여자야. 어떡해야 그들이 따라올까? 부드럽게? 아님 거칠게 다뤄야 할까? 그리고 또 하나. 진땀 흘리면서 절대 못해… 지휘할 땐 폭군이 되어야 해. 민주주의로는 안 돼.”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 이런 자막이 나온다. “안토니아는 평생을 음악에 바쳤고 유명 교향악단의 객원 지휘자로 활약했다. 그럼에도 상임 수석 지휘자는 된 적이 없다. 2008년, 유명 평론지 ‘그라모폰’에서 세계 20대 교향악단을 뽑았는데 여성 수석 지휘자가 있는 악단은 하나도 없었다.”

음악사에서 ‘위대한 음악가’는 언제나 남성이었다. 여성은 그저 취미로만 음악을 하면 된다는 가부장적 세계관의 산물이었다. 특히 오케스트라 지휘자는 작곡가나 연주자 보다도 가장 근래까지도 여성이 차별받거나 배제되는 영역이었다. “여기에는 단원을 이끌 수 있는 지도력과 권위가 필수적이다. 그런데 이 모든 능력이 여성에게는 결여되었다고 여겨졌다. 또한 오케스트라 단원이 대부분 남성이라는 사실도 여성의 지휘자로서의 진출을 어렵게 만드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민은기 『음악과 페미니즘』) 하지만 지휘자가 되기 위해 ‘남성같은 여성’이 되려고도 하고, 차별받지 않기 위해 더 많은 땀을 흘리며 분투했던 여성 지휘자들이 있었다. 그래서 지휘자가 되는데 성공한 여성들은 더 이상 ‘극소수’가 아니게 되었다. 이제는 여성 지휘자들의 맹활약상을 곳곳에서 보게 된다. 

여자경 대전시립교향악단 예술감독 ⓒKim Hain
여자경 대전시립교향악단 예술감독 ⓒKim Hain

올해 여성 지휘자가 이끄는 연주회를 자주 관람했다. 가장 최근의 공연이 현재 대전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를 맡고 있는 여자경의 국립국악관현악단과의 연주였다. 서양의 정통 클래식 음악을 해온 지휘자가 대체 국악관현악을 어떻게 이끌까 궁금해서 9월 1일 국립극장을 찾아갔다. 첼로, 피아노와 국악관현악의 협주는 마치 신세계를 경험한 것 같은 매력을 뿜어냈다. 특히 ‘아리랑 환상곡’은 국악으로도 서양 오케스트라의 선율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것이 신기하고 놀라웠다. 워낙 인상적이라서 프로그램북을 다시 살펴봤더니 마침 여자경 지휘자가 쓴 얘기가 나온다.

“많은 다양한 아리랑 음악이 있지만 이 곡이 주는 진한 감동이 남달랐던 것 같습니다. 서양 오케스트라와 연주할 때는 플루트의 솔로로 시작을 하는데요, 당시에 연주할 때는 플루트 연주자에게 대금처럼 혹은 소금처럼 비브라토나 퇴성을 연주해달라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하프 연주자에게도 가야금처럼 소리 내달라 하기도 하였고요. 서양악기를 가지고 국악기처럼 흉내를 내달라고 했던 것을 이번에는 국악기를 가지고 서양악기들의 앙상블을 만드는 쪽으로 접근해 보려 합니다.” 여자경이 의도했던 것이 그런 것이었고, 나의 귀에도 서양 챔버오케스트라의 관현악 연주 같이 들렸으니 그녀의 생각은 성공을 거둔 셈이었다. 어째서 여자경을 가리켜 ‘악보의 모든 비밀을 알 때까지 공부하는 지휘자’라고들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서양음악을 했던 사람인데도 국악관현악곡들을 꿰뚫고 자신있는 태도로 국악 연주자들을 세심하게 장악하며 연주를 이끌어갔다.

장한나 ⓒHan-Na Chang Music Official
지휘자 장한나 ⓒHan-Na Chang Music Official

장한나는 또 어떠한가. 첼리스트로는 어린 나이에 벌써 세계 정상의 자리에 올랐지만 24세 때 정식 지휘자 데뷔를 한 뒤로는 지휘에만 전념해왔다. 이제는 세계적인 여성 지휘자로 더 유명해졌고 2022년 9월부터는 함부르크 심포니의 수석 객원지휘를 맡고 있다. 지난 6월 14일에 있은 빈 심포니 내한 공연에서 장한나는 블루스 리우와의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제3번 협연, 베토벤 교향곡 제3번 연주를 훌륭하게 이끌었다. 장한나가 지휘할 때, 그리고 커튼콜 때의 모습을 보면 자신이 하고 있는 음악을 정말 좋아하고 즐긴다는 느낌이 든다. 즐겁고 행복한 에너지를 나눠주는 지휘자다. 장한나는 9월 17일부터 오랜 스승인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와 함께 전국을 돌며 협연을 한다. 장한나는 스승 마이스키와의 만남을 ‘자신의 삶을 바꾼 사건’으로 말하곤 했다. 이제는 나란히 거장이 된 스승과 제자가 함께하는 협연이 흥미롭다.

지휘자 성시연 ⓒYongbin Park
지휘자 성시연 ⓒYongbin Park

지난 8월 30일에는 성시연이 한경arte 필하모닉을 지휘했다. 2006년 게오르그 숄티 국제 지휘 콩쿠르 우승, 2007년 구스타프 말러 지휘 콩쿠르에서 ‘1위 없는 2위’를 수상했던 성시연은 그 뒤로 국제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부드러운 카리스마와 열정을 갖춘 지휘자로 주목받아왔다. 2007년 보스턴 심포니 사상 최초의 여성 부지휘자로 임명되었고, 2009년부터 2013년까지는 서울시립교향악단 부지휘자로 활동했다. 이날 연주회에서도 성시연은 특유의 여유로운 당당함을 보여주었다. 지휘대로 걸어가는 그녀의 모습을 보노라면 자신감에 대한 신뢰가 저절로 생겨난다. 성시연은 9월 19일에 예술의전당에서 KBS교향악단과 함께 ‘선율의 미학’을 갖는 등 활발한 국내 활동도 이어가고 있다.

성시연도 과거에 이렇게 토로한 적이 있다. “제가 공부를 마치고 막 데뷔할 때만 해도 여성이라는 것 자체가 많은 이슈가 되었어요. 특히 콩쿠르에서 그걸 실감했죠.” 하지만 오케스트라가 여성 지휘자들을 대하는 태도도 이제는 많이 바뀌었다고 말한다. “예전에는 기 싸움이 있기도 했지만 지금은 정말 좋은 여성 지휘자들이 많이 배출되어서 그런지 색안경을 끼고 보기 보다는 같은 지휘자로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SPO> 2021년 1월호) 영화 ‘더 컨덕터’에서 안토니아 브리코가 남성 단원들로부터 겪어야 했던 불편한 시선 같은 것이 이제는 사라졌다는 얘기이다.

김은선 지휘자 ⓒ김태환/서울시향 제공
김은선 지휘자 ⓒ김태환/서울시향 제공

20대 시절부터 유럽과 북미에서 잇달아 '여성 최초' 기록을 세우며 ‘금녀’의 벽을 깼던 김은선의 얘기도 빼놓을 수 없다. 현재 미국 샌프란시스코오페라(SFO) 음악감독으로 있는 김은선은 내년 4월 베를린 필하모닉의 객원 지휘자로 무대에 서게 되었다. 오랜 역사의 베를린 필하모닉은 까다롭고 보수적인 것으로도 유명해서 동양계 여성인 김은선이 객원 지휘를 맡게 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로 꼽히고 있다. 올해에는 한국에서의 공연은 없었지만,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는 우리의 여성 지휘자이다.

외국 여성 지휘자들의 발걸음도 잦아진다. 지난 7월에는 빈 필하모닉의 수석 바수니스트인 소피 데르보가 한국에 와서 지휘와 협연을 동시에 하는 연주회를 했다. 한경arte 필하모닉을 지휘한 데르보는 악장마다 일단 지휘를 하다가 바순 연주로 들어가곤 하는 분주함 속에서도 안정적인 연주를 이끌었다. 바수니스트의 지휘는 처음 보았는데 앞으로 지휘자로서도 한몫 할 듯 싶었다.

9월 17일에는 우크라이나 출신 여성 지휘자 옥사나 리니우가 예술의전당 무대에 올라 국립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평화의 선율’을 들려준다. 리니우는 세계 지휘계에서 여풍을 선도하는 지휘자다. 바이로이트 오페라 페스티벌 145년 역사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여성 지휘자였고, 259년 전통의 볼로냐 시립극장에서도 금녀의 벽을 무너뜨렸다. 이번 공연은 우크라이나 작곡가 예브게니 오르킨의 '밤의 기도'가 첫 곡으로 연주된다. 지난 3월 리니우 지휘로 우크라이나 청소년 오케스트라가 세계 초연한 작품인데, 우크라이나 전쟁 희생자들을 기리는 곡이다. 조국의 평화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이 선율을 타고 전해지게 된다.

음악사 연보를 들여다 보니까 브라질 작곡가 시키냐 곤자가가 1885년에 자작곡을 갖고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최초의 여성 지휘자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녀는 당시 브라질 음악계에서 보기 드문 여성 음악가로, 많은 차별 속에서도 활발한 음악활동을 했다. 그로부터 백수십년의 세월이 지나서야 많은 여성들이 지휘봉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여성 음악가에 대한 편견과 차별에 맞선 여성 지휘자들의 오랜 분투가 있었기에 이제는 여성 지휘자들이 포디엄(podium)에 당당하게 서고 있는 것이다. 오늘 여성 지휘자들을 향한 박수 세례가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님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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