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르나=AP/뉴시스] 리비아에 강력한 폭풍우가 상륙해 12일(현지시각) 중부 연안도시 데르나 곳곳이 파괴됐다.
[데르나=AP/뉴시스] 리비아에 강력한 폭풍우가 상륙해 12일(현지시각) 중부 연안도시 데르나 곳곳이 파괴됐다.

리비아 도시 데르나에서 발생한 홍수로 6000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리비아 관계자가 밝혔다.

13일(현지시각)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폭풍 '다니엘'로 발생한 홍수로 사망자가 지금까지 6000명이 넘었으며 1만명 이상이 실종됐다.

압둘메남 알-가이티 데르나 시장은 알아라비야 TV에 출연해 “홍수로 파괴된 지역수를 기준으로 사망자 수가 1만8000~2만명에 달할 것”이라고 추산했다.

리비아 동부 행정부의 히샴 치쿠아트 장관은 "바다에 수십 구의 시신이 계속 버려지고 있다"고 말했다.

구조대는 생존자를 찾기 위해 무너진 건물 잔해를 파헤치고 있으며 희망은 사라지고 있다. 사망자 수는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리비아의 동부 항구도시 데르나시는 지난 10일 근처에서 대규모 홍수가 발생했다. 데르나 남부의 댐 2곳이 무너지면서 순간적으로 수위가 3m까지 올라가 상당수 주민이 제대로 피할 겨를도 없이 익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유엔 이민기구인 국제이주기구(IOM)는 데르나에서 최소 3만명의 난민이 발생했다고 발표했다.

데르나시에 가족들이 살고 있던 우사마 알 후사디 씨는 로이터에 “아내와 다섯 자녀를 찾고 있다. 실종 또는 사망으로 아버지 가족 중 최소 50명을 잃었다”며 울면서 말했다.

시신 수백 구가 공동 묘지에 쌓여 있지만 실종자 신원을 파악해 줄 생존자도 부족해 사태 수습은 더딘 상황이다. 

천재·인재 겹친 복합 재앙

[마르지=AP/뉴시스] 리비아에 강력한 폭풍우가 상륙해 11일(현지시각) 마르지 시내가 물에 잠겨 있다. 지중해성 폭풍 '다니엘'로 리비아 동부에 홍수와 산사태가 발생해 최소 6000명이 숨졌을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마르지=AP/뉴시스] 리비아에 강력한 폭풍우가 상륙해 11일(현지시각) 마르지 시내가 물에 잠겨 있다. 지중해성 폭풍 '다니엘'로 리비아 동부에 홍수와 산사태가 발생해 최소 6000명이 숨졌을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외신들은 리비아의 홍수피해가 리비아의 취약한 지형, 환경 파괴, 기후위기, 정치적 분열, 부패, 경제적 불안정, 낡은 시설 등 여러 복합적 문제들이 합쳐져 재앙을 낳았다고 분석하고 있다.

지중해 연안 저지대에 위치해 홍수에 취약한 데르나의 지리적 요인이 피해를 키웠다는 분석이 나온다. 데르나는 ‘와디’라고 불리는 건조한 자연 계곡 끝에 자리 잡고 있는데, 지난 10일 토네이도를 동반한 폭풍 다네일이 뿌린 비에 와디가 깔때기 역할을 하면서 순식간에 물이 도시 중심부로 밀고 들어왔다. 

데르나로 향하는 길목에 자리한 댐 2개가 무너지며 데르나 지역이 완전히 침수됐다.

데르나의 한 주민은 가디언에 “물이 모이는 일부 계곡의 깊이는 약 400m에 이른다”며 “그래서 댐이 무너지자 물이 원자폭탄처럼 방출됐고, 다리 8개와 주거용 건물이 완전히 무너졌다”고 말했다.

재난 위협은 이미 예견돼 왔다. 지난해 학술지에 발표된 연구 논문에서 리비아의 한 수문학자는 계절에 따른 와디의 반복적인 범람이 데르나에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대규모 홍수가 발생하면 그 결과는 도시에 재앙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후에도 댐의 보수는 이뤄지지 않았다.

아흐메드 마드루드 데르나시 부시장은 “무너진 댐은 2002년 이후 유지보수가 되지 않았고, 엄청난 양의 폭우를 견딜 수 있는 기반 시설이 구축돼있지 않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재난 예측과 경보, 대피 체계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10년 넘게 정치혼란이 이어지면서 풍부한 석유자원에도 불구하고 사회기반 시설이 빈약해 피해가 더 커졌다.

그리스, 튀르키예와 불가리아를 덮쳐 큰 피해를 낸 폭풍 다니엘이 다가오는 데도 리비아 당국은 댐 수위를 조절하거나 주민들을 대피시키는 등 조치를 전혀 취하지 않았다.

정치 갈등과 경제 실패가 기후변화와 맞물리면서 대재앙을 몰고 왔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리비아의 경제 전문가 모하메드 아흐메드는 “안보 혼란과 댐 안전 조치에 대한 당국의 감시 소홀이 데르나에 재앙을 초래했다”면서 “두 가지 요인은 앞으로 더 많은 재앙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두 정부, 두 총리

내전으로 파괴된 리비가 벵가시 시내에서 한 어린이가 달리고 있다. ⓒ유니세프
내전으로 파괴된 리비가 벵가지 시내 거리에서 한 어린이가 달리고 있다. ⓒ유니세프

리비아는 지난 2011년 ‘아랍의 봄’ 혁명 여파로 무아마르 카다피 정권이 무너진 뒤 정치적으로 동서로 분열돼 있다. 리비아는 유엔과 서방이 인정한 과도정부 리비아 통합정부(GNU)가 서부를, 군벌 리비아국민군(LNA)이 동부를 나눠 장악하고 있다.

수도 트리폴리에는 압둘 하미드 드베이바 총리가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리비아 정부를 이끌고 있다. 벵가지에서는 반군 오사마 하마드 총리가 강력한 군 사령관 칼리파 히프터의 지원을 받으며 동부 행정부를 통치하고 있다.

동부와 서부의 정부가 대립하면서 대립하면서 무정부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부와 동부 사령관은 각각 수해 지역의 구조 활동을 돕겠다고 약속했지만, 성공적인 협력 기록은 없다.

두 의회는 국제사회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수년째 단일화에 실패했다. 2021년 총선을 계획했으나 이뤄지지 않았다. 

2020년까지 양측은 전면전을 벌였다. 히프터의 군대는 수도를 점령하기 위해 공격을 했지만 실패했다. 1년 동안 수천명이 희생됐다. 지난해 동부 지도자 파티 바사가는 트리폴리에 정부 장악을 시도했으나 민병대 간의 충돌로 철수했다.

정부군과 반군에 대한 지역과 세계의 지지도 나뉘었다. 히프터 반국은 이집트와 러시아, 요르단, 아랍에미리트의 지원을 받고 있으며, 서부 리비아 행정부는 튀르키예와 카타르, 이탈리아의 지원을 받고 있다.

중동 석유 붐 일으킨 독재자 가다피

리비아의 민족주의자이자 독재자였던 무아마르 가다피 ⓒBBC 홈페이지 갈무리
리비아의 민족주의자이자 독재자였던 무아마르 가다피 ⓒBBC 홈페이지 갈무리

리비아의 민족주의자이자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는 대홍수 이전 리비아의 상징이었다.

독실한 이슬람교도이자 열렬한 아랍 민족주의자였던 카다피는 육군 대위였던 1969년 9월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이드리스 왕을 물러나게 한 뒤 정권을 잡았다. 그는 군의 총사령관이 되었고, 또 리비아의 새로운 통치기구인 혁명평의회의장으로 뽑혔다.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 대통령의 열성적인 추종자였던 카다피는외국 지배의 부당한 경제적 유산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이집트 나세르의 힘은 수에즈 운하였고 카다피의 힘은 석유였다.

1950년대 후반에 리비아에서 상당한 매장량이 발견되었지만, 추출은 자국의 국내 소비자들에게 유리하도록 가격을 책정하고 수익의 절반을 차지하는 외국 석유 회사들에 의해 통제됐다. 카다피는 석유 회사들이 거부할 경우 생산을 중단하겠다고 위협하면서 계약의 재협상을 요구했다.

1970년 그는 리비아 내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 기지와 영국군 기지를 철수시켰다. 같은 해에 리비아에 살고 있는 이탈리아 사람들과 유대인 공동체 대부분을 추방했다. 1973년에는 모든 외국인 소유 석유 재산을 국유화했다

그는 외국 석유회사 간부들에게 "5000년 동안 석유 없이 살아온 사람들은 정당한 권리를 얻기 위해 몇 년 동안 석유 없이 살 수 있다"는 기억에 남는 말을 하며 외국 석유회사들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리비아는 그 승부수가 성공했고, 리비아는 개발도상국 중 처음으로 자국의 석유 생산을 통한 수입의 대부분을 확보했다. 다른 나라들도 곧 이 선례를 따랐고, 1970년대 아랍의 석유 붐이 시작됐다.

리비아는 이익을 거둘 수 있는 최고의 위치에 있었다. 걸프 지역 국가들과 생산 수준이 비슷하지만, 아프리카에서 가장 적은 인구 중 하나인 (당시 300만 미만), 검은 황금은 리비아를 부유하게 만들었다.

가다피는 부를 재분배했지만 석유 수입과 다른 거래로부터 그 자신의 가족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무시하기 어려웠다. 평등을 촉진하기 보다는 충성심이 많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재분배가 이뤄졌다.

[트리폴리=신화/뉴시스] 17일(현지시각) 리비아 트리폴리에서 시민들이 리비아 봉기 11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고 있다.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가 축출된 리비아 민중 봉기가 일어난 지 11년이 됐지만 리비아는 여전히 정국 불안과 혼란에 시달리고 있다.
[트리폴리=신화/뉴시스] 17일(현지시각) 리비아 트리폴리에서 시민들이 리비아 봉기 11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고 있다.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가 축출된 리비아 민중 봉기가 일어난 지 11년이 됐지만 리비아는 여전히 정국 불안과 혼란에 시달리고 있다.

2010년 12월 튀니지에서부터 아랍 세계에 반란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꼽은 다음 차례의 상위 그룹에 리비아는 포함되지 않았다.

이집트의 무바라크와 튀니지의 벤 알리가 실각한 것처럼, 가다피를 무너뜨리려는 리비아 국민들, 특히 동부의 국민들은 너무 강했다. 

2011년 반란이 확산되고 그의 통치에 대한 위협의 심각성이 명백해지자, 카다피는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반체제 인사들과 망명자들에 대한 무자비함을 전혀 잃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카다피가 이끄는 정부군은 반군을 지원하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군사적 개입을 막아낼 수 없었다.  UN 안전보장이사회는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한다는 명분으로 나토의 군사적 개입을 승인하는 결의를 채택했다.

4월 30일 카다피의 바브 알아지지야 관저에 대한 공중 폭격때  카다피의 막내아들인 사이프 알 아랍과 손자 3명이 사망했다.

2011년 8월 반군이 트리폴리를 장악하면서 카다피 세력은 무너졌다. 10월 20일 카다피 친위세력의 마지막 거점도시인 수르트가 반군에 의해 점령 당했고 카다피는 10월 31일 현장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BBC에 따르면 대통령직에서도 대령 계급장을 달고 있었던 가다피 대령은 복부에 9mm 총탄을 맞고 사망했다.

BBC는 카다피에 대해 "너무나 독특하고 예측할 수 없는 스타일로 세계 무대를 휘저었으며 세계의 혁명가에서 부랑아(pariah) 로 전략적 동반자에서 다시 부랑아로 돌아갔다고 평했다. 그는 자신과 혁명을 재창조하는 데 일생을 보냈다. 한 아랍 평론가는 그를 "중동 정치의 피카소"라고 불렀다. 

카다피 이후에도 리비아는 여전히 정부군과 반군이 대립하는 무정부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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