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

원피스를 입을까, 수트를 입을까

문상을 가야 하는데 옷장 들여다보며 갈등한다. 오래전 검정색 여름 원피스를 마련해 걸어뒀지만 갑작스런 욕망이 단순한 삶을 방해하는데 결정 장애라는 말에 시원해지지도 않는다. 다양성의 개념에 너그러워지긴 해도 선택의 기로가 상존하니 주위 세계는 깔끔하게 이분돼 있는 게 분명하다. 욕망이 기꺼이 세분을 받아들이고 고통의 바다를 헤엄치는 것도 감내하게 하는데 그 물속에 빠져 있으니 객관이 어렵다. 같은 일을 놓고 고민과 선택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차갑고 ‘슬픈’ 객관이 필요해 보인다. 친구를 구하지 못하고 울면서 계단을 올라가는 맥스에게 들려주는 나인틴 헌드레드의 마지막 이야기에 처연한 유머의 정수가 있다.

배멀미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 스틸컷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 스틸컷

‘떠 있는 도시(배)를 떠난 것이 잘한 일이었을까.’ 높은 계단 중간쯤이라는 미장센 속에서 트럼펫을 어루만지는 맥스 투니(프루잇 테일러 빈스 분)의 내레이션을 들으며 관객도 각자의 인생을 사유하기 시작한다.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The Legend of 1900)의 천재 피아니스트 나인틴 헌드레드(팀 로스 분, 이후 NH)는 유럽과 아메리카를 오가는 거대한 여객선 버지니아 호에서 태어나 배에서 살다가 약 45세쯤 배와 함께 사라진다. 알레산드로 바리코 원작인 독백체 희곡 『노베첸토』(Novecento)를 읽으면서 피아노의 선율을 듣고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영화를 보면서는 음악 시를 읽는 듯 한 진기한 경험을 한다.

NH(27세)와 맥스(24세)는 승객 2000명을 태우고 한 해 여섯 차례 유럽과 아메리카를 오가는 여객선 버지니아 호에서 만난다. 풍랑 속에서 배멀미 하던 맥스를 향해 연주복 차림의 안정된 걸음으로 다가온 NH는 피아노 의자에 태우고 연주를 들려주며 ‘멋진 경험’의 멀미약을 선사하며 둘은 친구가 된다. 12년 만에 폐여객선에서 재회하는 마지막 장면에서도 NH는 이 첫 만남의 대사를 말한다. “배멀미 하나?” 자네의 인생은 아직도 흔들리고 있나? 트럼펫을 팔아버리고 삶이 역사가 돼버린 맥스는 NH의 안타까운 시선과 마주한다. ‘자네가 걸어 들어오는 걸 보고 난 기쁨과 작별했어.’ 맥스의 눈물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 스틸컷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 스틸컷

대니 부드맨 티 디 레몬 나인틴 헌드레드라는 이름에는 대니 부드맨이 레몬 상자에서 1900년에 발견해서 키운 아이라는 주인공이 ‘실존’한다. 이름이 불려질 때마다 자신을 객관할 수 있는 상황이 설정돼 있는 NH는 배의 밑바닥에서 일하는 석탄부의 손에 자라고 바로 그곳에서 죽음을 선택한다. ‘난 언제나 돌아간다.(I always go back)’ 계약을 깰 수는 없다는 음반 제작자에게 NH가 던지는 이 말은 숱한 경우의 복선이면서 생과 소멸의 은유이기도 하다.

흔들리는 세상에서 꼿꼿하게 걷는 것과 움직이지도 않는 세상에서 끝없이 멀미하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이야기를 들려줄 사람, 말을 이해하고 즐거움을 공유하는 동반자만 있다면 ‘가능성 있는 삶’이라는 게 NH의 생각이다. “내가 불행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 절대 그런 일은 없어.” NH의 선실 벽 사진 속의 사람들(세계적인 인물들을 포함한)도 NH에게 하선을 권했을 것이라는 추측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의 마음을 움직인 사람은 NH의 고독에 대해 ‘운이 좋다(lucky)’고 말하던 이태리 출신의 초라한 농부다. 평생 바다만 보고 살아온 그에게 ‘바다의 소리’에 대한 농부의 말이 객관에 대한 새로운 ‘체험’의 숙제를 남긴다.

존재론적 안정과 상상력의 메타포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 스틸컷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 스틸컷

재즈 피아니스트 젤리 롤 모턴(클래런스 윌리암스 3세 분)의 도전을 받은 NH는 군중의 외침에서 위기를 느끼고 사력을 다한 연주로 자신의 삶을 지킨다. 어리석고 의미 없는 전쟁의 축소판으로 해석했을 것이다. 맥스는 NH가 뛰어난 학습 능력, 직관력, 상상력을 지녔다는 것은 알지만 의식을 팽창시키는 통찰력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한다. 도처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음을 보고 내려가던 계단을 다시 올라가는 NH는 단순한 두려움이 아니라 두려움의 대상을 적극적으로 바라보는 존재론적 안정(ontological stability)을 획득한 인간으로 보인다.

NH는 ‘보지 못한 것(모든 것의 끝)’을 향해가는 것을 거부한다. 확신에 차 음반을 들고 쫓아가지만 무심한 볼 키스를 남기고 군중에 떠밀려가는 여인을 붙잡지 않는 이유다. 관객은 아쉽지만 오차 없는 사랑에는 군중(외력)을 이기는 양방향 동일 주파수가 필요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육지로 날 찾아올 거지?” 진실을 묻는 NH에게 맥스는 타성으로 대답하고 NH는 맥스가 친구로 있는 ‘현재’에 머물기를 택한다. 1년 후 맥스는 유유히(guaranteed) 배를 떠나지만 전쟁을 겪으면서 황폐해지고 트럼펫을 팔아 끼니를 이어야 할 형편에 이른다.

수백 톤 다이나마이트가 설치된 배의 밑바닥에 숨은 NH에게 맥스는 이미 ‘스쳐 지나간’ 과거의 친구다. 데리고 나가려는 이유, 친구의 도움으로 자신의 인생을 살리려는 가장 정당한 이유도 NH는 알고 있다. 그러나 트럼펫을 갖고 있지 않은 맥스는 NH가 오래전에 본 ‘우정의 끝’을 보는 눈도, NH를 배에서 내리도록 설득할 힘도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자네는 평범한 사람이야. 익숙해져야 해. 용서하게, 친구.” 마지막 우정의 대사는 첨예하나 처연한 유머만큼이나 슬프고 뜨겁다.

필자: 문수인 작가. 시집 '보리밭에 부는 바람' 저자. 현재 SP 영화 인문학 강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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