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영의 영상 뽀개기] 2023년 여성서사 콘텐츠

결실의 계절이자 수확의 계절인 가을은 다가올 추수 이후의 황량한 겨울을 떠오르게 한다. 가을향기가 짙어간다는 것은 그만큼 연말이 가까워진다는 반증이다. 그런 만큼 가을은 늦지 않게 미리 한 해를 되돌아보는데 안성맞춤인 계절이다. 2023년에도 여성이 주인공이며, 여성간의 협력과 연대를 보여주면서 여성의 이슈 및 관점에 주목한 여성서사 콘텐츠가 여럿 등장하여 낯섦, 공감, 혹은 이슈를 만들어내면서 관심을 받았다.

학교폭력 콘텐츠 전면에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학교폭력 가해자들에게 복수하는 문동은(송혜교). ⓒ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학교폭력 가해자들에게 복수하는 문동은(송혜교). ⓒ넷플릭스 제공.

먼저 포문을 연 것은 나비의 날개짓이 되어 학교폭력의 이슈화라는 태풍을 몰고 온 <더 글로리>(넷플릭스)이다. 드라마 이전에도 학교 폭력은 드라마의 소재로 자주 이용되어 왔고, 그만큼 심각한 사회 문제로 인식되어 왔지만 드라마가 생생하게 보여준 폭력의 장면들은 시청자의 놀라움을 자아냈고 분노를 폭발시켰다. 더 나아가 학생들 간의 폭력 사건을 수면에 드러내는데서 그치지 않고, 교사에 의한 학교 폭력도 이슈화시키면서, 사회적 문제가 집약되어 학교라는 울타리에서 자행되는 폭력이 용납될 수 없는 행위라는 것을 알려주면서 큰 파급력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더 글로리>의 강력한 영향력은 기존 레거시 미디어와 달리, 표현 수위가 한층 자유로운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플랫폼이기에 폭력 장면이 처절하게 그려짐으로써 그 잔인함이 더욱 강하게 시청자들에게 전달되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또 다른 날갯짓으로 배우 송중기의 경력 단절 발언을 꼽을 수 있는데, 한 인터뷰에서 “업계에서 아빠, 남편이 된다는 것은 때때로 일자리를 잃는다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한 이야기가 논란을 일으켰다. 이후 결혼, 임신과 출산으로 설 자리를 잃을까 두려웠던 순간을 고백한 전도연, 김희선, 송윤아, 라미란 등 수많은 여배우들이 토로하는 발언들이 기사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더 나아가 일하는 여성들의 경력 단절에 대한 논의로 확대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경력 단절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톱 인기 남배우의 말이 불합리함에도 아내, 엄마라는 이유로 당연시 되어온 여성들의 경력 단절에 대한 두려움과 부당함을 조명토록 한 것이다.

여기에 여성들이 겪어 온 경력 단절이 드라마의 소재로 간간히 등장했지만, 논란이 불거지던 시점에 방영되어 많은 인기를 얻은 <닥터 차정숙>(JTBC)의 화제성 또한 빼놓을 수 없다. 20년차 주부인 차정숙(엄정화 분)이 가정의학과 1년차 레지던트가 되어 벌어지는 일들을 담은 드라마이다. 이는 과거 전업주부였던 여성이 의도치 않게 요리나 인테리어 등 재능을 발견하여 성공적인 사업가로 거듭나는 일일드라마 속 여주인공의 이야기와는 조금 결이 다르다. 오히려 경력단절을 상상하기 어려운 고소득 전문직인 의사가 결혼과 출산으로 경력 단절이 된 상황은 일과 가정의 양립이 어려운 일임을 더욱 부각시키는 요소가 된다.

‘유리천장’ 부순 여성들의 성공

드라마 ‘남남’ 스틸컷 ⓒKT스튜디오지니 
ENA 드라마 ‘남남’ 스틸컷 ⓒKT스튜디오지니 

여성서사 콘텐츠에서 일하는 여성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지적되는 ‘유리천장’을 깨부수는 여성의 성공을 다루는 이야기도 종종 접하는 소재인데, 올해 초 방영된 <대행사>(JTBC)가 대표적인 예이다. 드라마 주인공인 고아인(이보영 분)이 광고 회사의 최초 여성 임원이 되어 자신의 커리어를 쌓아가는 모습을 담은 드라마로, 유리 천장이 사라진 듯 보이지만 실제로 여성의 성공을 방해하는 견고한 사회문화적 벽이 존재함을 보여준다.

반면, 엄마로서의 여성을 그린 작품 가운데 눈에 띄는 작품으로 <남남>(ENA)을 들 수 있는데, 이 작품은 신기함과 낯섦이라는 독특한 경험을 선사하였다. 제목과 달리 자식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모성을 담아낸 <나쁜 엄마>(JTBC)나, 물욕과 자녀 교육에 몰두하는 엄마를 그린 <행복배틀>(ENA)과 같은 드라마와 확연히 다른 모성과 모녀 관계를 그려낸다. 어린 나이에 낳은 딸과 사는 싱글맘 김은미(전혜진 분)가 갖는 욕망과 기존 가족 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이 정의한 가족의 테두리 안에서 모녀관계, 가족관계를 정립하려는 그녀의 태도는 기존 드라마가 보여주지 못한 것이다.

여기에 <길복순>(넷플릭스), <정이>(넷플릭스), <무빙>(디즈니플러스)이 담아낸 싸움 잘하는 여성들은 남성에 편중된 액션 장르에 여성 액션이 가능하고, 인기를 끌 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퀸메이커>(넷플릭스)는 정치하는 여성을, <마당깊은 집>(ENA), <마스크걸>(넷플릭스), <셀러브리티>(넷플릭스), <종이달>(지니TV), <박하경 여행기>(웨이브), <술꾼도시여자들2>(tvN)는 성공, 외모, 삶에 대한 여성의 각기 다른 욕망을 보여줬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tvN 예능 프로그램 ‘댄스가수 유랑단’에 나오는 (왼쪽부터) 가수 김완선, 엄정화, 이효리, 보아, 화사. ⓒ tvN 댄스가수 유랑단 공식 인스타그램
tvN 예능 프로그램 ‘댄스가수 유랑단’에 나오는 (왼쪽부터) 가수 김완선, 엄정화, 이효리, 보아, 화사. ⓒ tvN 댄스가수 유랑단 공식 인스타그램

2023년 예능에서 두각을 드러낸 콘텐츠로는 <댄스가수 유랑단>(tvN)을 꼽을 수 있다. <서울체크인>(티빙)에서 언급된 이효리의 아이디어가 구체화되어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다양한 팬들을 만난 김완선, 엄정화, 이효리, 보아, 화사라는 각 세대별 대표 댄스 가수들의 합동 공연을 담아낸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은 상대적으로 짧은 수명을 가진 댄스 가수인 30~50대인 5명의 가수들, 경력 도합 129년인 그녀들을 통해 세대를 아우르고 뛰어넘는 위로와 연대를 보여준다. 특히 본업인 가수로서의 생명력에 대한 고민을 갖고 있던 엄정화와 이효리는 본 방송에서 본업에 대한 짙은 그리움을 드러내는데 결국 프로그램 종영 후에 가수로서 대중 앞에 선다. 또한 MZ세대 여성 가수와 예능인이 출연한 <지구오락실2>는 시즌1에 이어 높은 인기를 모았다. 미션 수행과정에서, 그리고 동영상 숏폼 콘텐츠 촬영에서 보인 이들의 연대와 열정은 웃음과 긍정적인 이미지를 남겼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듯이, 아직 남은 2023년에 기대되는 것은 무엇보다 6년 만에 본업인 가수로 복귀하는 이효리의 존재감과 영향력이다. 2013년 결혼 이후 예능 중심으로 출연했던 이효리가 ‘텐미닛’으로 그려냈던 20대의 이효리를 지나, ‘후디에 반바지’로 그려낼 40대의 이효리는 어떠할지, 덧붙여 “많이 벌고, 많이 쓰고, 기부하고 싶었다” 는 말로 11년 만에 광고를 찍는 그녀의 영향력 또한 궁금함을 더한다.

가수 이효리가 신곡 ‘후디에 반바지’를 발표했다. ⓒ안테나 제공
가수 이효리가 신곡 ‘후디에 반바지’를 발표했다. ⓒ안테나 제공

남성이 주인공이고, 남성의 관점에서 전개되었던 대중문화콘텐츠에서 여성이 주인공을 맡고, 여성의 이야기와 관점이 중심이 되는 여성서사 콘텐츠의 등장은 참으로 반길만한 일이다. 또한 이러한 콘텐츠들이 담아내는 다양한 여성의 면모와 협력의 모습은 기존 콘텐츠가 만들어왔던 가부장적 지배 이데올로기를 깨뜨리는데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하지만 여성서사 콘텐츠의 제작과 인기의 바탕에는 치열한 플랫폼 간 경쟁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채널과 플랫폼이 다양화되면서 갈수록 시청자를 사로잡을 수 있는 킬러 콘텐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되는데, 오리지널 콘텐츠 전략으로 성공한 넷플릭스를 선두로, 신생 채널인 ENA가 다수의 여성서사 콘텐츠를 내놓은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여성 시청자들을 확보하기 위해 여성서사 콘텐츠가 전략적으로 제작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성서사 콘텐츠의 제작은 환영할 만하지만, 한편으론 언제든 여성시청자들에 대한 미디어 기업들의 관심과 여성서사 콘텐츠의 경쟁력이 떨어지면 자연스레 여성서사 콘텐츠 제작 또한 사라질 수 있다는 우려가 생기게 되는 지점이다. 또한 <지구오락실2>가 시즌 1과 달리 미션 수행에서 여성성을 강조하는 마사지숍이나 쇼핑 등을 더 많이 담아내고, <술꾼도시여자들2>가 시즌1과 달리 여성시청자들에게 혹평을 당한 것을 보면 인기 여성서사 콘텐츠가 쉽게 그 정체성을 잃어갈 수 있음도 엿볼 수 있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콘텐츠에 대한, 그리고 미디어 기업을 향한 시청자들의 적극적인 목소리와 응집력이 필요하다. 

tvN 예능 프로그램 ‘지구오락실2’ ⓒtvN 제공
tvN 예능 프로그램 ‘지구오락실2’ ⓒtvN 제공

마지막으로 여성서사 콘텐츠가 만들어낼 수 있는 잘못된 고정관념도 경계해야하는데, 경력 단절과 유리천장을 깨부술 수 있는 여성은 전문직 여성이어야 한다거나, 성공하는 여성은 내면의 결핍을 지니고, 과도하게 사회성이 결여된 인물로 그려지는 등 여성에 대한 새로운 잘못된 고정관념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러한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다양한 세대의 여성이 등장하고, 각양각색의 배경을 지닌, 저마다 다른 욕망을 지닌 여성들, 그리고 고립된 여성이 아닌 연대하는 여성들의 모습이 담겨진 여성서사 콘텐츠의 다양성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김은영 고려사이버대학교 문화예술경영학과 외래교수
김은영 고려사이버대학교 문화예술경영학과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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